한강의 한 줄기인 노곡천으로 둘러싸인 언덕과 그 위의 충적층에 놓여 있다. 1985년 12월 7일부터 1986년 1월 22일까지 실시된 중부고속도로 공사 구간의 지표조사에서 고인돌 3기, 돌무지무덤 3기가 알려졌다.
그 뒤 1986년 4월 15일부터 6월 4일까지 45일간의 발굴로 제3호 돌무지무덤 아래의 지층을 밝히려고 구덩을 파던 중 붉은 찰흙층에서 구석기시대 문화층이 드러났다. 2㎡를 발굴하고 모두 21점의 석기를 찾아냈다.
차돌맥암을 재료로 하여 찍개·찌르개·긁개·밀개들을 만든 수법이나 석기의 갖춤새에서 석장리유적의 새기개·밀개문화층과 유사함을 볼 수 있다. 시기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늦은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인돌은 3기가 모두 탁자식으로 자갈돌이 깔린 옛 물길 위에 세워져 있었다. 3기의 고인돌이 서로 8.5m를 사이에 두고 세모꼴로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밑바닥을 발굴하면서 알려졌다. 고인돌의 껴묻거리로는 민토기와 붉은간토기의 청동기시대 토기만이 출토되었다.
제1호 고인돌에서 북쪽으로 70m 떨어진 곳에서는 민토기 밑바닥에 찍혀 있는 인도형 볍씨(Oryza sativa Indica)자국을 찾았다. 이로써 당시 사람들이 벼를 심기 시작한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경기도 강화군 우도에서 나온 볍씨자국과 같은 종으로서 우리 나라 벼농사의 새로운 면을 알 수 있었다.
돌무지무덤은 도로공사를 하면서 이미 완전히 부서진 것을 수습 발굴한 것이다. 제2호 돌무지무덤의 경우에는 동서 길이 6m, 남북 길이 7.9m의 큰 것이었으나 바닥부분만 겨우 찾아냈다.
이 돌무지무덤은 드러난 격자무늬토기나 덧띠토기 등의 출토로 볼 때 4세기 백제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제1호 돌무지무덤에서는 사람의 허벅지뼈 머리도르래가 발굴되었다.
궁평리의 옛 이름이 궁뜰마을이라고 전해오고, 유적의 남서쪽 산비탈에 남아 있는 매우 큰 주춧돌 무더기 등으로 볼 때 백제 때 이 마을에 궁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궁뜰유적은 이와 같이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와 백제 초기시대에 걸쳐서 사람이 살았던 자취를 남기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의 중요한 백자 가마터가 있고, 마을 언저리에서 백자조각들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곳은 구석기시대부터 삶이 이어지고 있는 곳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