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공휴(公休), 호는 휴휴(休休). 아버지는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 구윤빈(具允斌)이며, 어머니는 부사과(副司果) 신긍구(申肯構)의 딸이고, 부인은 청송 심씨(靑松沈氏)이다.
1795년(정조 19)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798년(정조 22)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임명되었다. 1800년(정조 23)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한 뒤 가주서(假注書)를 거쳐 1803년(순조 3) 전적(典籍), 이듬해수안군수, 1806년(순조 6) 장령, 이듬해 대독관(對讀官)과 부사과를 거쳐 1808년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다시 전적으로 임명되었다가 1809년(순조 9) 다시 정언이 되었다.
1812년(순조 12)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냈고, 1813년(순조 13) 가을에는 함경도암행어사에 임명되어 다음해 봄까지 관북 일대 24읍 5,700리에 달하는 험준한 노정을 다니며 왕명을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이때의 현지 체험은 장편 「북정(北征)」을 위시해 60여 수의 한시를 짓게 했고, 국문 가사 「북새곡(北塞曲)」 등 많은 문필 유산을 남겼다.
1814년(순조 14) 정언에서 사간으로 옮겼다. 1815년(순조 15) 집의(執義)에 임명되었고, 1818년(순조 18) 부승지에 올랐으며, 1819년(순조 19) 잠시 외직을 맡아 회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1820년(순조 20) 다시 내직으로 옮겨 부승지를 거쳐 공조참의를 지냈고, 1822년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1824년(순조 24) 시강원보덕(侍講院輔德)을 거쳐 1828년(순조 28) 첨지사(僉知事)가 되었다. 강유(剛柔)를 겸한 성품으로 관직 수행에 철저했음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마치고 올린 서계(書啓)에 잘 나타난다.
그는 문학을 생활화해 장편 「북정」과 한시문 외에도 가사 작품을 통해 삶의 다양한 실상을 펴 보였다. 특히, 장편기행가사 「북새곡」은 함경도어사 임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현지에서 보고 겪은 일들을 사실적으로 쓴 작품으로, 가난과 가렴주구에 시달리는 현지 백성들의 삶의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되어 있다.
회양부사직을 맡아 현지에서 보고 겪은 바를 가사로 지은 「교주별곡(交州別曲)」은 명승지 금강산으로 관광차 오는 상위 계층들의 횡포가 현지 백성들에게 얼마나 가혹했는지 그 실상이 생생하게 부각되어 있다.
기타의 가사 작품 「황계별곡」·「희주가」·「동호별곡」·「제석탄」·「금강곡」·「춍셕가」·「진회곡」·「사미인곡」·「격젹가」·「기슈가」 등도 시의식이나 소재·시어·기법 면에서 각기 작자의 개성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그의 시가 작품들은 근대 의식에 바탕을 둔 점과, 생활 체험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작품화한 점이 특성이다. 저서로는 가사집 『북새곡』과 문집 『휴휴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