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종해(權鍾海)는 1869년 충청남도 논산에서 태어났으며, 강원도 고성에서 생활하였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이명은 권주성(權周成)이다. 자는 선명(宣明)이며, 호는 성파(惺波)이다. 아버지는 권인규(權仁圭)이며, 장남 권기수(權基洙)와 더불어 삼대가 의병으로 활동하였다.
1906년에 강릉 유림 대표로 친일 군수 이재화(李載和), 친일 거부(巨富) 이근우(李根宇) · 조익환(曺翊煥) 등을 추방하는 명령을 내리는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령을 듣고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무장투쟁에 나섰다. 강원도 인제의 운두령(雲頭嶺)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고, 1908년 2월 이강년(李康秊) 부대와 함께 백담사전투(百潭寺戰鬪)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같은 해 5월 강원도 정선 북면 단림(丹林)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다. 6월에는 일본군이 권종해의 본가에 침입하여 가족을 구타하고 집에 불을 지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에도 무력 항쟁을 준비하던 중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의 장재호(張在鎬) 집에서 붙잡혀 10년형을 언도받고 6년간의 수감 생활을 하였다. 1919년 3 · 1운동이 일어나자 강원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무장 항일운동을 준비하였으나 검거되어 무기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22년에 옥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권종해의 공훈을 기려 1968년 대통령 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