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건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인순부윤, 평안도관찰사,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청파(靑坡)
시호
정무(貞武)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460년(세조 6)
본관
행주(幸州)
주요 관직
판중추원사
정의
조선 전기에, 인순부윤, 평안도관찰사,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행주(幸州). 호는 청파(靑坡). 고려 때 신돈(辛旽)의 일당인 기현(奇顯)의 후손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학행으로 이름이 높아 세종 때에 포의(布衣)로 발탁되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 뒤 연안군수(延安郡守)가 되었는데, 군민이 진상하는 붕어잡이의 고충을 생각하고 부임 3년 동안 한 번도 먹지 않았다. 또 제주목사로 나가서는 주민이 전복따기에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전복을 먹지 않았으며, 부모가 죽으면 구덩이나 언덕에 버리는 풍속을 교화시켜 예절을 갖추어 장사지내도록 하였다.

이어서 내직으로 옮겨 집의·형조참의·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448년(세종 30) 전라도관찰사 겸 전주부윤에 부임, 선정을 베풀었다. 이듬해 호조참판으로 승진하고, 세종이 죽자 고부사(告訃使)의 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서 개성부유수가 되었다가 단종이 즉위하자 대사헌이 되어, 당시 국왕의 유약함을 기화로 해 권력을 농단하던 여러 신하들을 탄핵하였다.

먼저 승정원승지들의 권력 농단, 특히 도승지 강맹경(姜孟卿)의 탐학을 탄핵하고 공론의 보장을 요구했으며, 이어서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의 횡포를 논박하였다. 그 뒤 인순부윤(仁順府尹)을 거쳐서 평안도관찰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판중추원사에 이르렀다.

당시 수양대군이 권력을 전횡하면서 마침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자, 관직을 버리고 두문분출하였다. 세조가 다섯 번이나 찾았지만, 청맹(靑盲: 당달 봉사, 눈뜬 장님)을 빙자하고 끝내 절개를 버리지 않았다.

기건은 나올(羅兀: 너울이라고도 함)을 창안해 부녀자들의 외출시 머리 덮개로 이용하게 해서, 우리나라 풍속에서 너울을 처음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뒤에 청백리에 뽑혔으며, 전라남도 장성의 추산서원(秋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문종실록(文宗實錄)』
『단종실록(端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월사집(月沙集)』
『대동기문(大東奇聞)』
집필자
최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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