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장군 의복은 조선 중기의 장군 김덕령의 묘에서 출토된 16세기 후기의 복식류이다. 1965년 광주 무등산에 있던 김덕령(1567∼1596)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출토되었다. 철릭 2점, 장옷 1점, 과두 3점, 저고리 1점, 사폭바지 1점 등 모두 8점이다. 저고리는 풍성한 느낌의 무명 솜저고리인데 겉감은 무명, 안감은 삼베로 되어 있다. 바지는 현재 옷감이 소실되고 바지 형체의 솜만 남아 있다. 이 의복은 임진왜란 당시 남녀 평상복 유물로서의 가치가 있다. 특히 사폭바지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965년 7월에 광주광역시 무등산 이치(梨峙)에 있던 충장공(忠壯公)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16세기말 선조 때의 복식유물이 출토되었다. 김덕령은 주지하다시피 임진왜란 당시의 의병장이었다. 출토된 유물은 1980년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었는데 철릭(帖裏) 2점과 장옷[長衣] 1점, 과두 3점, 그리고 여자 저고리 1점과 사폭바지[唐袴] 1점 등, 모두 8점이다.
철릭은 2점이 출토되었다. 한 점은 ‘모시홑철릭’이고 다른 한 점은 솜과 무명 안감만 남은 ‘솜누비철릭’인데 솜누비철릭은 현재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되어 있다. 모시홑철릭은 상태가 양호한 편인데 길이가 121.8㎝이다. 철릭은 상의와 치마가 연결된 옷이므로 각각의 길이를 보면 상의 길이가 50.3㎝이고 치마 길이는 71.5㎝이다. 상하의 비례는 1:1.4가 된다. 허리에는 큼직한 맞주름이 드문드문 잡혀있다. 화장은 110㎝이며 진동은 30㎝인데 좌우 소매 모두 탈착식이며 분리된 소매의 길이는 71㎝이다. 겨드랑이에는 사각접음무가 달려 있다. 깃은 너비가 12㎝인 칼깃인데 동정은 없다.
장옷은 지정 당시 직령포로 명명된 유물 중의 하나였으나 재조사를 통해 ‘무명 솜누비 장옷’으로 변경되었다. 겉섶과 안섶이 모두 두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동정이 달린 목판깃은 좌우의 섶 안으로 들여 달렸다. 겨드랑이 아래에는 커다란 사다리꼴 무와 겨드랑점의 사각접음무가 달렸다. 또한 소매 끝은 접어 입도록 되어 있다.
한편 직령포로 명명되었던 나머지 3점, 즉 ‘백무명겹유직령포’와 ‘백무명겹납의직령포’, ‘명주직령포’는 재조사에서 큰 저고리에 해당하는 ‘과두’로 변경되었다. ‘무명 솜누비 과두’는 얇게 솜을 두고 0.8㎝ 간격으로 곱게 누볐다. 뒷길이는 107㎝이며 화장은 85㎝이다. 칼깃에 동정은 없으며 겉섶은 이중섶이 달렸다. 겨드랑이에는 커다란 사다리꼴무와 작은 사각접음무가 달렸다. 가는 고름이 달렸던 흔적도 남아 있다. ‘백무명겹납의직령포’로 명명되었던 옷은 누비가 아닌 ‘무명 겹 과두’로, 뒷길이는 108㎝이며 화장은 85㎝이다. 칼깃에 동정이 없으며 겉섶은 이중섶이다. 겨드랑이에는 커다란 사다리꼴무와 작은사각접음무가 달렸다.
저고리는 1점이 출토되었는데 풍성한 느낌의 ‘무명솜저고리’이다. 안감은 거친 삼베이다. 뒷길이는 69.5㎝이고 화장은 76㎝, 품은 74㎝이다. 진동은 28㎝이며 수구는 27㎝이다. 깃너비가 10.4㎝인 목판깃이 달렸는데 겉섶에는 내어달렸고 안섶에는 반 정도 들여 달렸으며 동정은 없다. 겨드랑이에는 사다리꼴 무만 달려 있다. 저고리의 길이가 길면서 옆이 막힌 여자 견마기로 추정된다.
바지는 1점이 출토되었다. 현재 옷감은 소실되어 바지의 세부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는 없다. 바지 형체의 솜만 남아 있는데 훼손이 심하여 굵은 무명실로 솜을 꿰매어 놓은 상태이다. 윤곽선과 허리말기 등으로 보아 임진왜란 후 착용하기 시작한 남자 사폭바지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사폭바지 유물이 된다.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김덕령의 유물이라는 의미 외에도 당시 남녀의 평상복 유물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특히 솜만 남은 사폭바지는 가장 시기가 올라가는 사폭바지 유물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