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신라의 삼국통일부터 발해 멸망 때까지를 말한다.
‘남북국시대론’이라는 것은 발해사도 한국사에 넣어 발해를 ‘북국(北國)’으로, 통일신라를 ‘남국(南國)’으로 부르자는 주장이다.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를 거쳐 고려로 전개되는 종래의 역사 체계를 벗어나 발해사를 적극적으로 한국사에 포함시키자는 논리이다. 발해의 건국자인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 장수였고, 주체세력도 고구려유민들이었으므로 결국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국가였다는 데에 논리적 근거를 두고 있다.
발해는 멸망 후 ‘사라진 왕국’으로 버림받다시피 했는데, 관심을 갖고 우리나라의 역사체계에 넣으려 했던 것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와 이승휴(李承休)의 ≪제왕운기≫에서였다.
그러나 이들이 발해사를 한국사의 체계에 넣었다 하더라도 통일신라와 대비시켜 한국사의 일부분으로 이해하려는 이른바 ‘남북국’의 착상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남북국시대론이 학문적인 신념을 바탕으로 조리 있게 전개된 것은 1784년에 유득공(柳得恭)이 엮은 ≪발해고 渤海考≫의 서문에서이다.
그는 “고려가 발해 역사를 편찬하지 않음으로써 그 국세가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도다.”라고 하면서, 신라가 삼국을 통일해 한반도의 남부를 차지했으니 그것을 남국으로, 고구려가 망한 뒤에 그 후예가 그 땅 위에 발해국을 세웠으니 그것을 마땅히 북국으로 하는 역사체계를 세워야 했으며,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은 고려 왕조의 잘못이라고 하였다.
특히, 그가 아쉬워한 것은 고구려 영토가 여진과 거란에 점거되었어도 그 땅을 되찾을 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사실이니, 이는 고려가 발해사를 엮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개탄하고 있다.
이러한 의식은 김정호의 ≪대동지지 大東地志≫(1864년경)로 이어졌다. 그는 단군조선에서 고려까지의 역사를 다룬 <방여총지 方輿總志>에서 발해사를 독립된 항목으로 다루었다.
<발해국 渤海國>항목에서는 삼한·삼국(신라·가야·백제)·삼국(고구려·신라·백제)·남북국(신라·발해)으로 이어지는 고대사 체계를 제시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다가 일제시대에 들어와 다시 재론되었다.
장도빈(張道斌)이 ≪국사 國史≫(1916·1946)에서 ‘남북국’시대를 설정했고, 권덕규(權悳圭)의 ≪조선유기 朝鮮留記≫(1924)와 황의돈(黃義敦)의 <상고시대 上古時代>(1943)라는 글에서는 각기 ‘남북조’시대를 설정하였다.
해방 이후 새로운 사학의 시각에서 엮어진 역사서에는 대개 발해사를 국사의 체계에 넣어 서술하고 있으나 남북국사의 체계 자체는 거론되지 않았다. 그후 식민지사관의 극복과 민족의 주체의식이 고조되던 1970년 무렵부터 남북국시대론이 다시 거론되었다.
1970년 5월에 개최된 전국역사학대회에서 이우성(李佑成)이 <삼국사기와 발해문제>라는 논문 발표를 통해 국사가 남북국사로 엮어져야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국사학계에 자극을 주게 되어 한우근(韓㳓劤)의 ≪한국통사 韓國通史≫가 개설서로서는 처음으로 이 체계를 따랐다.
1980년대에는 많은 개설서에서 남북국시대라는 용어를 채택하기 시작했고, 송기호(宋基豪)·한규철(韓圭哲) 등이 다시 이 용어 사용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국사 교과서에도 반영되어 한국사에서 발해사의 비중이 커지게 되었다.
근래에 남북국시대론이 수용되는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반론도 적지 않아, 아직도 발해사는 한국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제기된 반론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시대구분의 기준과 관련된 문제이다. 고병익(高柄翊)·이기백(李基白)이 제기한 것으로,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북국시대라는 것이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이기 때문에 역사서술에 적절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다른 기준을 가지고 시대구분을 한다고 하더라도 왕조에 따른 시대구분 방식은 역사 서술의 기본이 되는 것이다. 한국사에서 삼국시대란 용어나 중국사에서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현실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를 인정할 경우, 발해와 신라를 포괄해 ‘통일신라시대’라고 하는 것보다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문제점을 덜 안고 있다.
둘째,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하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주장이다. 하마다 고사쿠(浜田耕策)나 이성시(李成市)는 한국학자들이 주장한 남북국시대론의 논리적 취약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남북국시대론에 논리적 취약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 반대의 논리가 타당성을 얻을 수는 없다. 반면에 중국학자나 러시아학자들은 발해가 말갈족이 세운 나라이기 때문에 남북국시대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 볼 때 발해는 고구려 유민을 주체로 한 국가였으므로, 역시 수긍하기 어렵다.
셋째, 현재적인 입장이 강하게 투영된 주장들이다. 이것은 다시 두 종류로 나뉜다.
① 발해와 신라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므로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북한의 견해가 대표적인 것으로서,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인정하면서도 이 용어의 사용은 반대하고 있다.
그것은 이들이 사회구성체를 바탕으로 시대구분을 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지만, 더 근저에 깔린 이유는 현재의 남북한 관계와 직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조선)이란 하나의 통일체를 상정하고 그것이 일시적이나마 갈라져 있는 것이 남북한인데, 신라와 발해는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남북국이란 용어에 대응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지나치게 현재적인 입장을 역사에 투영한 것으로서, 중국의 남북조시대란 용어가 하나의 통일체에서 갈라진 것을 상정하는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② 이와 비슷한 발상으로서, 발해와 신라 또는 발해와 고려 사이에 동족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해 남북국시대론을 부정하는 경우이다. 이용범(李龍範)은 발해사에 우리 역사와의 공동추억체의식(共同追憶體意識)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을 들어 이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소극적이었다.
또 신라가 발해를 북국이라 부른 사실이 최치원의 <사불허북국거상표 謝不許北國居上表>와 ≪삼국사기≫에 나타나 있는데, 일본학자들은 이것이 동일민족의 북쪽 부분이란 의식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순한 방위 개념에 불과하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고려가 발해 유민들을 동족아닌 이민족으로 취급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민족과 민족의식이 확립된 것은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이후이며, 당시는 이러한 의식들이 형성되기 시작하던 시기이므로 현재의 민족의식을 기준으로 당시를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다.
이상으로 반론을 살펴보았지만,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할 수 없다는 두번째 주장은 여러 가지 증거를 볼 때 받아들이기 어려우며, 너무 현재적 시각에서 발해사를 바라보려는 세번째 주장도 문제가 있다.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라는 전제가 받아들여진다면, 7세기 말에서 10세기 전반에 이르는 시기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남북국시대가 가장 적절한 것이다.
그런데, 이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두 가지 문제가 다시 제기될 수 있다.
① 한국사에서 신라사와 발해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다른데 어떻게 동일한 무게를 느끼게 하는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을 보면, 신라사가 발해사보다 훨씬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발해와 신라가 병존했던 당시에는 양국의 국력이 대등할 정도에 이르렀다. 대체로 8세기에는 신라의 국력이 앞섰지만, 9세기에 들어 발해가 해동성국(海東盛國)이란 칭호를 얻을 무렵에는 어느 정도 대등한 정도까지 이르렀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있었던 양국 사이의 경쟁사건들은 이를 잘 말해준다. 897년에 양국 사신 사이에 벌어졌던 윗자리 다툼 사건, 872년과 906년에 벌어졌던 양국 유학생 사이의 빈공과(賓貢科) 수석 다툼 사건들이 그러한 예이다. 그렇다면 다음 시기의 계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시대구분을 하느냐, 아니면 당시 상황을 기준으로 시대구분을 하느냐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여기서 참고가 되는 것은 중국의 남북조시대이다. 그 뒤에 일어난 수나라는 기본적으로 북조를 계승한 국가였으나 중국에서는 남북조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를 원용한다면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는 데에도 무리가 없다.
②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문제이다. 전통적으로 삼국통일을 최초의 민족적 통일로 평가해왔고, 지금도 남한에서는 이 견해를 수용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까지 이 견해를 따르다가, 1960년대부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분적 통합에 불과하다고 평가했고, 1979년 ≪조선전사≫부터는 부분적인 통합이란 사실마저 부정하였다.
이렇게 삼국통일의 의의를 부정하면서 상대적으로 고려의 후삼국통일을 부각시켜, 고려를 역사상 첫 통일국가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발해사가 한국사에 속한다면 어떻게 신라가 통일을 했다고 할 수 있는가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삼국통일과 남북국시대론이 상호 배치된다고 하면서 고려의 통일이 최초의 통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한국사에서 언제부터 하나의 국가로만 남게 되었는가 하는 기계적이고 외면적인 판단에 불과하다.
고려의 통일이 발해까지 아우른 것이 아닌 사실에서도 이러한 주장에는 타당성이 없다. 더구나 발해가 건국된 것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30년이 지난 뒤이고, 통일전쟁이 일단락된 뒤로부터는 20여 년이 흐른 뒤이다. 따라서 발해는 통일이 일단락된 뒤 새로이 형성된 국가였다.
그런 의미에서 발해의 건국은 한국사의 흐름에서 볼 때, 삼국통일이 영토적으로나 민족적으로 부분적이었다는 한계성을 보완해주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국시대란 용어가 통일신라나 삼국통일이란 용어와 결코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
남북국시대란 용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과연 발해사가 한국사에 편입될 수 있는가 하는 사실이 규명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① 발해의 고구려 계승성, ② 고려에의 계승성, ③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가 제대로 밝혀져야 한다.
①과 관련해 발해는 건국집단의 구성이나 지배집단의 성씨(姓氏) 구성에서 고구려계통의 사람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특히 지배층의 성씨에서 고구려계통의 고(高)씨가 다수를 점하고 있고, 발해 초기의 지배층들이 묻혀 있는 육정산(六頂山)고분군에서 고구려식 석실봉토분(石室封土墳)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리고 문왕(文王)시대에는 일본과의 외교에서 고구려의 천손의식(天孫意識)을 원용해 천손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그의 후반기에는 고구려 계승국이라는 의미로서 고려국(高麗國)을 표방하기도 하였다.
강왕(康王)시대에도 일본에 보낸 국서(國書)에 고구려 계승의식이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강왕 스스로 국서에서 이러한 의식을 표명한 것은 발해 지배층의 인식을 밝히고 있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한편 872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계통의 사람을 내세워 발해 사신을 접대했던 사실을 볼 때 고구려 계승의식이 지속되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따라서 발해사의 고구려 계승성은 자명하다고 할 수 있다.
② 발해의 고려에의 계승성은 많이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발해의 멸망 무렵부터 장군 신덕(申德), 예부경 대화균(大和鈞), 공부경 대복모(大福謨), 좌우위장군 대심리(大審理), 검교개국남 박어(朴漁) 등 고위관료들이 잇따라 무리들을 이끌고 고려에 망명하였다.
또한 세자인 대광현(大光顯)까지 내투해 보호를 받았다. 이로부터 2백여 년간 발해 유민들이 간헐적으로 고려로 망명해와 한국사의 일부를 이루게 된 것은 민족적 계승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금의 태(太)씨는 고려로 들어온 발해 왕실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발해는 대외적으로 당나라의 신하였으면서 내부적으로는 스스로 황제국의 질서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통일신라와는 다른 태도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태도는 고구려로부터 계승된 것으로 보이는데, 나중에 고려도 내부적으로 황제국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양자 사이의 계승성도 유추될 수 있다.
③ 발해와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 종래에는 2백여 년간 대립적이었다고 일컬어져 발해사를 한국사에 넣는 데에 장애가 되어 왔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먼 것으로, 양국은 상호 대립 혹은 교류를 하기도 하였다.
양국이 대립하거나 세력 경쟁을 벌였던 사건으로는 먼저 733년에 벌어졌던 양국 사이의 전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의 요구로 신라가 발해를 공격했던 이 전쟁을 제외한다면, 양국 사이에 더 이상의 전쟁은 없었다.
9세기에 들어와 신라의 국세가 약화되고 반대로 발해의 국세가 강화되면서 발해에 대한 과거의 우위를 유지하려는 신라와 현실적 우위를 확인받으려는 발해 사이에 당나라에서 상호 경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에 못지 않게 양국 사이에 교섭을 시사하는 기록들이 다수 나타난다. 발해 건국 직후 신라는 대조영에게 제5품 대아찬의 벼슬을 주었다.
또 ≪삼국사기≫을 보면, 790년(원성왕 6)과 812년(헌덕왕 4) 두 차례 신라가 발해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이 때의 파견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이들은 당시 개설되어 있던 신라도(新羅道)를 이용했을 것이다.
≪신당서 新唐書≫ 발해전에는 발해의 주요 대외교통로의 하나로서 신라도가 들었고, ≪고금군국지 古今郡國志≫에는 발해의 책성부(柵城府)와 신라 국경의 천정군(泉井郡) 사이에 39개의 역(驛)이 있었다고 하였다. 양국 사이에는 이렇게 상설적인 교통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훨씬 더 빈번한 접촉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한편 발해의 3성 가운데 선조성(宣詔省)이 있는데, 9세기 통일신라에 선교성(宣敎省)이 설치된 것은 명칭의 유사성으로 보아 발해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으로 세 가지 검토를 통해 발해사가 한국사에 접목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보았다.
발해사는 과거에 항상 한국사의 일부로서 다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사에서 제외했던 시기가 있는가 하면, 적극적으로 넣으려고 했던 시기가 있고, 양면적인 인식이 공존하던 시기가 있었다.
신라인들은 발해를 고구려계 국가로 인식하면서 한편으로 말갈계 국가로도 인식하였다. 최치원은 ‘옛날의 고구려가 지금의 발해가 되었다.’고 했고, “고구려 잔당들이 모여서 발해를 세웠다.”고 한 반면에, 다른 글에서는 ‘발해는 말갈족이 번성해 세운 나라’라고 하여 발해가 말갈계 국가임을 천명하는 상반된 인식을 보였다.
후삼국 통일을 기반으로 성립된 고려는 기본적으로 신라 계승의식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때로는 같은 고구려 계승국가라는 점에서 발해를 주목하였다.
고려 초기에 발해를 ‘혼인한 나라’ 또는 ‘친척의 나라’라고 하여 동족의식을 나타냈다. 이에 발해 유민들을 지속적으로 받아들였으며, 934년에는 발해 세자 대광현을 왕족으로 우대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삼국사기≫에서처럼 발해를 서술 대상에서 제외하는 신라 중심의 역사 인식이 주축을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 발해에 대한 관심이 점차 고조되면서 ≪삼국유사≫나 ≪제왕운기≫에서와 같이 발해사가 한국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초기에 발해사가 배제되어 주변국의 역사로 전락하였다. 그 후에 점차 인식이 바뀌면서 발해사를 재발견하는 과정을 겪었다. 대체로 이 과정은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첫째 단계는 ≪동국통감 東國通鑑≫(1484)의 역사 인식이다. 여기서는 발해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신라에 이웃했던 역사로 파악하였다.
고려 태조의 대 거란 정책을, “거란이 발해에 신의를 저버린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기에 발해를 위해 보복을 한다고 하는가”하는 사론을 달아 비판한 것은 이 책의 역사 의식을 잘 반영한다.
둘째 단계는 발해사를 새롭게 다시 발견하는 과정에 해당한다. 이것은 다시 전기와 후기로 다시 나뉜다. 전기에는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던 나라로 발해를 인식했으니,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 東國地理誌≫(1615)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조선이 왜 약한 나라가 되어 끊임없이 외적의 침입을 받게 되었는가 하는 역사적 원인을 찾으면서, 그 원인을 고구려 영토의 상실에서 발견했고, 이러한 관심 속에서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한 나라임을 확인하였다.
그 결과 발해가 신라에 부속된 역사가 아니라 고구려에 부속된 역사로 파악되어 발해사가 처음으로 고구려 역사 뒤에 붙여서 설명되었다.
후기에는 발해가 고구려 영토를 계승했을 뿐만 아니라 건국자도 고구려 유민이었다는 인식이 등장하면서 발해사를 아주 적극적으로 한국사의 일부로 다루었다. 이러한 인식에는 신경준(申景濬)의 ≪강계고 疆界考≫(1756)가 선구를 이루었다.
그는 고구려가 망한 지 10년 후에 대씨가 고구려 유민을 불러일으켜 옛 땅을 회복했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를 공격해 고구려 왕의 치욕을 설욕했다고 하였다.
셋째 단계에는 고구려 계승국에 초점을 맞추어 발해사를 인식하던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발해를 통일신라와 대등했던 독립국으로 다루거나 일부에서는 발해가 신라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인식하였다.
이 때 두 가지 흐름이 나타나는데, 하나는 삼국이나 통일신라와 대등하게 세가(世家)·세기(世紀) 등으로 다루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남북국시대를 설정하는 경우이다.
전자는 이종휘(李種徽)의 ≪동사 東史≫(18세기 후반)에서 출발하였다. 여기서 발해의 역사를 세가로 다룸으로써 하나의 독립된 역사로 평가를 받게 되었다. 그의 발해사 인식은 홍석주(洪奭周)의 ≪동사세가 東史世家≫(1820년대)에서 더욱 강화되어 나타났다.
홍석주는 발해사를 신라·고구려·백제의 역사와 함께 세가로 다룸으로써 삼국과 발해를 동등하게 보았다. 한편 유득공의 ≪발해고≫가 선구적인 역할을 한 후자는 남북국시대론을 주장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흐름은 상호 보완적으로 결합되어야 함에도 19세기 초반을 지나면서 더 이상의 진전이 없이 중단되어 버렸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 후기의 발해사 인식은 미완의 형태로 끝나버리고 다음 세기의 과제로 넘겨졌다.
발해사 인식은 19세기 중반 이후로 장기간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개화기의 교과서들은 삼한정통론의 영향을 크게 받아 삼국통일을 강조함으로써 발해사 인식을 크게 축소시켰다. 그러다가 발해사 인식이 다시 크게 고양된 것은 일제시대 때이다.
특히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과 연계하면서 만주 지역의 북방사에 커다란 관심을 보이게 되었다. 이러한 인식은 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장도빈(張道斌)·권덕규(權悳奎) 등의 글에서 찾을 수 있다.
대종교에서도 남방사보다 북방사를 높이 평가하면서 만주에서 일어난 단군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1933년 발해 수도 동경성 부근에 발해농장을 세워 운영하기도 했으나, 민족 정신을 앙양한다는 목적 의식에 사로잡혀 북방사를 지나치게 과장한 면이 보인다.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1960년대부터 이용범이 연구를 주도했고, 북한에서도 같은 시기부터 박시형, 주영헌이 연구를 주도하였다. 이로부터 이들의 뒤를 잇는 연구자들의 실증적인 연구가 심도있게 진행되었다.
발해사 자체에 대한 다각도의 연구를 통해 남북국시대론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작업들이 진행됨으로써, 이제는 발해사가 한국사의 일부인지에 대해서 적어도 남북한 학계에서는 의문을 제기하는 일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