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에서 농경이 시작된 시대를 지금까지는 중동이나 유럽지역보다 조금 늦은 신석기시대 후기로 보아왔으나, 최근 신석기 전기 유적지에서 농사에 썼을 것으로 여겨지는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와 신석기 중기 이전에 이미 농경이 시작되었으리라는 추측을 불러일으킨다.
우리가 처음 쓴 농기구는 뒤지개[掘棒]이다. 이것은 긴 작대기의 한 끝을 뾰죽하게 깎은 것으로(이에 앞서 끝이 가는 생나무나 나뭇가지를 거의 그대로 썼을 것이다) 땅 속의 식물이나 그 뿌리를 캐고 씨앗구멍을 내는 데에 썼다. 뒤지개는 발전하여, 아랫도리에 발받침이 달리고 뒤에는 철기의 생산에 따라 끝에 쇠뿔모양의 날을 박고 손잡이도 붙여쓰게 되었다.
최근까지 제주도 일대에서 사용된 송곳따비가 바로 그것으로, 뒤지개는 따비로 발전하였다. 한편, 뒤지개와 함께 나무괭이도 썼다. 처음에는 ㄱ자로 굽은 생나무로 땅을 파고, 흙덩이를 깨고, 골을 타다가 뒤에는 끝부분에 돌이나 뼈를 잡아매어 쓰게 되었다.
이 밖에 뿔괭이도 등장하였는데, 이에는 사슴뿔을 그대로 쓴 것과 줄기로 자루를 삼고 그 가지를 가공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괭이도 뒤지개의 경우처럼, 철기시대에 들어와 날 끝에 말굽쇠모양의 날을 붙였으며(오늘날의 화가래가 그것이다), 시대가 더 지나면서 날 전체를 쇠를 부어 만든 오늘날의 괭이로 탈바꿈하였다.
이와 같은 괭이에 의지하여 농사를 지었던 시기는 신석기시대 전기부터 전기 후반(기원전 6000∼기원전 3000년) 사이일 것으로 여겨진다. 곡물을 빻는 데 쓴 갈개가 나온 것도 이 무렵으로, 처음에는 접시형이었으나 뒤에 안장형으로 바뀌었다.
접시형은 가운데가 우묵하며 한 손으로 쥘 정도의 둥근 갈돌로 으깨듯이 문질러 썼다. 이것은 신석기시대 유적보다 청동기시대 후기 유적에서 더 많이 나타난다. 오늘날에도 농가에서 많이 쓰는 돌확은 접시형 갈개의 후신이다.
안장형 갈개의 갈판 윗부분은 좌우 양쪽이 수평을 이루며 앞뒤는 조금 들렸다. 국수방망이 모양의 갈돌은 갈판 너비보다 길다. 이를 쓸 때에는 무릎을 꿇고 윗몸을 구부린 자세를 취한다.
안장형 갈개는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중기 이후의 대표적인 유적지에서 거의 빠짐없이 출토되며, 청동기시대부터 차차 줄어들어가 철기시대 유적에서는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오늘날의 절구나 맷돌은 이들 갈개에서 비롯되었다.
돌보습 · 삽 · 낫 · 따비와 반달형 돌칼 따위가 나타난 것은 신석기시대 중기(기원전 3500∼기원전 3000년) 무렵이다. 돌보습은 신바닥이나 나뭇잎을 닮았으며 길이 30∼65㎝의 것이 흔하다.
이 시기의 유적에서 피 또는 조가 출토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돌보습은 이들의 밭을 가는 데에 썼으리라고 생각되며, 이 때에는 한 사람이 앞에서 보습이 달린 틀을 끌고 다른 한 사람은 뒤에서 운전하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산간지대에서는 이를 사람이 끌기도 한다.
낫은 멧돼지 어금니를 잘라 만든 것이 나왔다. 두드러진 면의 양쪽을 갈아서 배가 나오고 휘어든 양곡면에 예리한 날을 세운 것으로 자루에 맞추기 위한 구멍도 뚫었다.
반달돌칼은 곡식의 이삭을 줄기에서 따는 데 쓴 연장으로 신석기시대 후기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널리 사용되었다. 특히, 청동기시대에 들어와 쌀 · 보리 · 콩 · 팥 · 조 · 수수 · 기장 따위의 곡물생산이 시작된 것도 반달돌칼이 유행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쓰인 대표적인 연장의 하나는 따비이다. 이것은 용도에 따라 송곳형따비 · 주걱형따비 · 말굽형따비 · 코끼리이빨형 따비로 나눈다. 특히 코끼리이빨형 따비를 쓰는 모습이 새겨진, 이른바 농경문청동기(기원전 4, 3세기 제품으로 추정됨)는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두 가닥으로 뻗은 날은 나무일 수도 있으나 끝에 쇠뿔모양의 청동제나 철제 날을 끼웠을 가능성도 매우 높다. 이 따비는 최근까지 충청도 · 전라도의 연안 및 도서와 제주도에서 사용되었고, 말굽형따비는 경기 · 서해의 도서지방에서, 그리고 나머지 유형의 따비는 제주도에서 사용되었다.
청동기시대에는 호미도 나타났다. 철기의 생산(기원전 3세기∼서기 3세기)에 따라 농기구는 한층 다양해지고 한가지 연장은 그 쓰임에 맞도록 분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보습 · 낫 · 호미 · 괭이 따위가 철제로 바뀌었으며, 무엇보다 소가 농사에 이용되면서 쟁기와 같은 연장이 발달하였다.
1921년부터 1986년 전반기 사이에 간행된 87종의 발굴보고서 및 기타 문헌에 나타난 삼국시대의 농기구는 보습 5점, 따비 22점, 괭이 5점, 쇠스랑 32점, 낫 284점, 살포 42점, 삽 4점 등 모두 394점에 이른다. 이들 7종 가운데 땅을 가는 연장이 4종이나 되어 당시 농기구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보습이 전국에서 고루 출토된 것은 삼국시대 초기부터 소에 의한 쟁기질이 일반화하였음을 일러주는 증거인 셈이다.
≪삼국유사≫ 노례왕조(弩禮王條)의 “이사(犁耜:쟁기와 보습)와 얼음창고를 만들고……”라는 내용도 이와 같은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다. 또 철기시대 내지 초기 삼국시대의 것으로 생각되는 경기도 가평군의 한 유적에서도 보습을 주조할 때 쓴 보습틀이 나왔다.
한편, ≪삼국사기≫ 지증왕조의 “각 주주(州主)와 군주(郡主)에 명하여 처음으로 땅을 가는 데에 소를 이용하였다.”는 기록은 국가에서 쟁기질에 소를 쓰도록 권장한 내용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보습 가운데 함경북도 출토품은 너비가 10㎝에 지나지 않아 골을 타거나 북을 줄 때 썼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 제주도의 보습도 12㎝에 불과하다. 나머지 3점은 크기나 형태가 오늘날의 것과 거의 같아서 쟁기제도는 삼국시대 초기에 이미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따비날은 말굽형이 대부분이고(20점), 코끼리이빨형은 2점뿐이다. 따비가 남북한에서 나온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 초기부터 널리 사용되었으리라고 추측된다. 특히 백제고분에서 2점의 코끼리이빨형 따비날이 출토되어 이 연장의 발생지에 대한 추측을 가능하게 하여 흥미롭다.
괭이는 영남지방(3점)과 북한지역(2점)에서 나왔는데, 영남괭이는 평균길이 20㎝, 너비 9㎝이며 굽통(길이 8㎝)까지 달려서 오늘날의 것 그대로이다. 이에 비하여 북한지역 출토품은 중앙 상부에 구멍에 못을 박아 자루에 고정시킨 다른 형태이다.
쇠스랑은 32점 가운데 1점만 발이 둘이고 나머지는 모두 발이 셋이다. 이들은 오늘날의 것에 비하여 조금 작을 뿐, 큰 차이는 없다.
낫이 전국에서 고르게, 그리고 대량으로 나온 것은 다른 연장보다도 널리 사용된 증거라고 하겠다. 날의 길이는 17∼20㎝의 것이 많으나 오늘날처럼 슴베를 자루 가운데 박지 않고 자루 끝을 날 너비만큼 길이로 째고 이에 날을 끼운 다음 나무쐐기를 쳐서 고정시켰다.
따라서 당시의 낫은 슴베라고 할 부분이 없었으며, 이와 같은 낫은 오늘날 제주도에서도 쓰이고 있다. 날을 자루에 고정시키는 방법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2점의 살포 가운데 76%가 영남지방에서 나왔다. 날은 부삽형과 말굽형의 두 가지로서, 부삽형이 압도적으로 많으며(35점), 말굽형은 7점에 지나지 않는다. 앞의 것 가운데 제일 작은 것은 3×4㎝이고 가장 큰 것은 10.7×18.7㎝이며, 날 한 끝에 굽통을 붙였다. 오늘날의 살포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
삽은 모두 경주의 무덤에서 출토되었다. 날의 길이는 18.7∼25㎝이며 굽통지름은 3.6∼4.8㎝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우리 농기구의 대부분은 4∼6세기경에 이미 그 틀이 잡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요 연장들이 전국에서 고루 사용되었고 지역에 따른 차이가 거의 없었으며, 더구나 오늘날의 연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뒤에 설명하는 대로 따비 · 보습 · 낫 · 쇠스랑 · 괭이 · 지게와 같은 중요 농기구들은 일본에 전해졌다.
조선시대에서는 초기부터 농업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농기구의 보급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이에 관한 몇 가지 정책이 있었다. 이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나라에서 농민들로부터 철을 거두는 일을 중지하거나 양을 줄이도록 한 것(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6월 계미조)과 나라에서 농기구를 생산하여 값싸게 보급하자는 논의(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 7월 신유조)를 들 수 있다.
또 김종서(金宗瑞)는 농기를 들여오는 무역자에게는 면세하도록 하자는 건의(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 3월 병오조)까지 하였다. 당시의 농기구 무역이란, 중국 농기구의 수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발달한 외국 농기구의 수입을 더욱 장려하자는 뜻인 것이다.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나 이런 사실들을 통해 당시의 위정자들이 농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 北學議≫에서 “지금 사람들은 옛 관습에 젖어 관청에서 파는 농기구를 사려 들지 않는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앞의 시책 가운데 나라에서 농기구를 생산, 판매하는 일은 18세기 말기에도 계속되었으나 정작 농민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관제품의 질이 매우 낮았던 데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농가에서는 무엇보다 소가 모자라서 쟁기나 써레 따위를 사람이 끄는 일이 많았다.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금양잡록 衿陽雜錄≫에서 “마을에 100호의 농가가 있으나…… 황소는 한두 마리뿐이어서 소 대신 아홉 사람을 고용해서 땅을 간다.”고 하였으며, ≪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조에도 돌림병으로 전국의 소가 많이 죽어 사람이 쟁기를 대신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8세기 말기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1789년(정조 22)에 내려진 이른바 <권농정구농서윤음 勸農政求農書綸音>에 따라 지방의 지식인들은 소가 없어 땅을 갈지 못하는 집이 적지않으니 통(統) 단위로 협동기구를 만들거나 농계(農契)를 모아 소를 장만하게 하자는 건의를 했다.
또한 농기구도 부족해서 부자들이 하루 빌려주고 며칠 동안 품으로 대신 갚도록 하는데, 그나마 얻어쓰기도 어려운 실정이므로 나라에서 대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중기 이후에도 일반 농가의 농기구 보급률이 매우 낮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사직설 農事直說≫은 우리 나라 최초의 농서로서 농학상 큰 의의를 지닌 명저이며, 당시 농기구의 모습을 살피는 데에도 뺄 수 없는 귀중한 서책이다. 무엇보다 농기구 이름을 이두나 향찰로 적어서 우리는 비로소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 전기의 농구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농사직설≫에 나타난 농기구는 모두 10종으로, 이에는 따비 · 쟁기 · 쇠스랑 · 써레 · 끌개[撈] · 번지 · 고무래 · 곰방메 · 끌개[縳柴木兩參個] · 끌개[木斫背] · 끌개[輪木] · 오줌구유 · 호미 · 낫 · 도리깨 · 키 · 날개 · 거적 · 섬 · 되 · 말 · 석 · 부리망 등 23가지가 포함된다.
이 가운데 땅을 삶는 연장의 종류와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아서 39%에 이른다. 더구나 쇠스랑과 써레가 네 번, 번지와 곰방메가 두 번씩 등장하고 끌개도 4종이나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흙덩이를 고루 부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의 농업기술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수리시설이 거의 없는 데다가 가뭄이 잦았으므로 무엇보다 흙을 잘게 삶고 바닥을 판판하게 골라서 씨를 뿌린 다음 이를 잘 덮어서 수분의 증발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논벼보다 밭벼를 더 많이 재배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농기구 이름을 중국명 그대로 쓰거나 중국명을 앞세우고 우리 이름을 붙이거나 이름을 대지 않고 형태묘사로 대신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었다. ≪북학의≫는 농업전문서가 아님에도 저자가 농기구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우리 것과 중국 농기구를 비교해 이의 장단점을 살폈으며, 재래농기구의 개량과 선진농기구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중국 농기를 수입, 제작하여 서울 근교에서 실제로 써보이면 농민들은 이를 따를 것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무자위[水車]의 모형을 만들어 농민들 앞에서 실험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과농소초 課農小抄≫는 농기구에 관한 항목을 따로 두고 이를 구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서책이다. 그는 농기조(農器條)에서 26종의 중국 농기구와 우리 것에 관한 의견을 덧붙였으며, 수리조(水利條)에서는 28개 연장의 개량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풍구를 스스로 제작, 실험하여 보인 일도 있었지만 농민들은 곡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꺼려서 이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춘궁기에 나라에서 내어준 곡식에는 잡물(雜物)이 많이 섞여 있었던지라 깨끗이 고른 곡식으로 갚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는 29종의 농기구 그림을 실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한글로 적었다. 종래 우리 농기구 이름을 ‘향명(鄕名)’ 또는 ‘속명(俗名)’이라고 낮추고 그나마 향찰이나 이두로 적었던 데에 비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획기적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병하(鄭秉夏)는 ≪농정촬요 農政撮要≫에서 26종의 농기구를 설명하면서 일본의 농업기술 도입에 관한 주장을 폈다.
한편, 사육신이었던 하위지(河緯之)가 그의 양자에게 남긴 유권(遺卷)을 통해 조선시대 초기에 한 개인이 소유하였던 농기구의 양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에 나타난 연장은 모두 20점으로, 그는 대표적인 상류 지배층의 한 사람으로서 선산에서 농장까지 경영하였던 만큼 개인 소유로서는 최대량인 셈이다. 하위지의 농기구와 1960년대말 각 지방 독농가들의 연장을 비교해 보면,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중요 농기구의 보유량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초기부터 농기구 보급에 대한 몇 가지 시책을 베풀었으나 성과가 적었고, 중기 이후에 실학자들이 농기구 개량에 앞장섰지만 중국 연장을 지나치게 내세웠던 까닭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이 타성에 젖어 있었던 점도 농기구 발달을 막은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
우리 나라에 일본 농기구가 처음 들어온 것은 1900년대초 일본 농민들의 한국 이주에 의해서이며, 조금 뒤에는 일본인 기술자들이 소규모나마 그들의 연장을 이 땅에서 만들었다.
한편, 우리 나라를 일본의 식량조달기지로 삼으려던 일제는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일본 농기구 보급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그들은 이 밖에 소형 석유발동기에 의한 정미기 · 양수기 · 회전탈곡기 따위도 들여왔다. 우리 농기구 가운데 가장 큰 변화를 겪은 연장은 쟁기이다.
뒤에 설명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무상리(無床犁:쟁기술이 지면에 거의 직각을 이룬 쟁기)와 장상리(長床犁:술 바닥이 지면에 평행을 이룬 쟁기)를 개량, 이른바 단상리(短床犁:술이 지면과 약 45°를 이룬 쟁기로 땅을 깊이 갈 수 있음)를 발명하였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에 들어와 재래쟁기를 압도하였다.
1924년 일본의 한 농기구제작소가 수원에 출장소를 설치, 대경호리(大慶號犁)를 제작한 것을 필두로(이들은 이 밖에 4종의 쟁기를 더 만들었다.), 1928년에는 다른 업자가 일본쟁기를 개량한 조경호리(朝慶號犁) 외 4종을 생산, 전국에 퍼뜨렸다. 그 뒤 1931년에 일제 송산리(松山犁) 4대가 들어왔는데, 이것은 1944년까지 모두 887대로 늘어났다.
한편, 1937년부터는 당시 조선총독부로부터 지정을 받은 한 회사에서 쟁기를 대량생산, 독점적으로 판매하기에 이르렀다.
온전히 사람이나 소에만 의지하거나 자연의 힘(물방아 · 물레방아 따위)을 이용하였던 우리 재래농기구들이 민족항일기에 접어들면서 부분적이나마 개량된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다. 쟁기류도 그렇거니와 특히 방아류는 발동기의 출현에 따라 크게 바뀌었던 것이다.
우리 농기구의 현대화는 1960년대에 들어와 시작되었다. 정부는 이 시기에 주로 재해대책을 위한 양수기와 병충해 방제용 동력분무기를 완제품 또는 반제품으로 도입, 공급하였다.
재래농기구에 가장 큰 변화를 준 것은 경운기이다. 경운기는 1959년부터 구미 · 일본 등지에서 수입해왔으나 1966년 80%의 국산화를 이룩하면서 대대적인 보급률을 보여, 현재는 농가필수품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경운기는 땅을 갈고 삶고 골을 타는 일뿐만 아니라 지게 및 달구지 대용으로도 큰 몫을 한다.
또 경운기에 부착된 엔진을 이용, 양수기나 분무기에도 이용되며, 경우에 따라서는 사람이나 화물까지도 실어나르는 자동차 구실도 겸한다. 경운기야말로 오늘날의 농가에서 뺄 수 없는 만능기계라고 하겠다.
이 무렵 같은 힘으로 재래쟁기보다 3∼5㎝를 더 깊이 갈 수 있는 재건쟁기가 나왔으며(1965년 현재 2만5870대 보급), 보리증산용 칼티베이터 및 파종기도 등장하였다.
이 밖에 농용트랙터, 고성능엔진을 부착한 석유발동기, 병충해방제용 미스트기 · 동력분무기 · 인력분무기와 자동탈곡기 · 수확기 · 건조기 · 도정기(搗精機)가 나타나 농촌 일손을 많이 덜게 되었고, 1980년대에는 곡물을 거둔과 동시에 탈곡, 선별하는 바인더 및 콤바인, 모를 심는 이앙기까지 선보여 농기구 기계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와 같은 농기구는 값이 비싸고 농민들 스스로 운전하기에는 기술적인 어려움도 적지않아, 아직은 보급 초기단계에 있는 셈이다. 현대농기구를 보유한 회사가 농가와 계약을 맺고 모를 심거나 거두는 일을 대행하는 새로운 현상도 나타나게 되었다. 한편, 최근에는 철로 만든 써레 · 지게가 등장하였으며, 플라스틱으로 만든 거름통 · 오줌통까지 나와서 농기구의 수명이 수 배 내지 수십 배로 늘어났다.
현대농기구 출현으로 많은 일손을 덜게 되어 농사일이 그만큼 수월해진 것은 사실이나 이 때문에 전통적인 이웃관계가 무너지고 각 농가는 고립화하는 추세에 있다. 예전에는 농사를 각 개인의 일이 아닌 마을 전체의 일로 여겨 품앗이 등을 조직, 서로 도왔으나 이제는 스스로 해결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또, 모심고 김매고 거두는 일에 농악대가 두레굿을 쳐서 고달픔 속에서도 일 자체에 기쁨과 보람을 느꼈으나 기계화작업이 이루어지면서 이것도 사라졌다. 그리고 농기구를 스스로 장만하는 대신 대량생산된 공산품을 사 쓰게 되어 농기구는 한갓 소모품의 위치로 떨어져버리고 말았다. 우리네 전통문화의 보금자리였던 농촌은 농업기계화현상에 따라 큰 진통을 겪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 나라에서 근래에까지 쓰던 농기구를 농사를 지어나가는 과정에 따라 분류하면 모두 16종이 되며, 이에 딸린 것은 120가지에 이른다.
논밭을 가는 연장에는 따비 · 가래 · 화가래 · 괭이 · 쇠스랑 · 극젱이 · 쟁기 등의 7가지가 있다. 이러한 것들은 농사를 짓는 데 기본이 되는 연장으로서, 지역에 따라 형태상의 큰 차이를 보인다.
따비는 가장 오래된 연장 중의 하나로, 이에는 경기도 해안과 섬에서 쓰던 말굽형, 제주도와 충청도 · 호남 연안지방과 섬에서 쓰던 코끼리이빨형, 제주도의 주걱형과 송곳형 등 네 가지가 있다.
가래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연장이다. 화가래는 괭이의 전신(前身)이다. 극젱이는 주로 밭에서 쓰는 것으로 날이 둥글넓적하며 볏이 달리지 않았으나, 쟁기는 날 끝이 뾰죽해서 땅을 깊이 가는 데에 유용하며 볏이 달려서 흙이 한쪽으로 떨어지게 한다.
삶는 연장에는 써레 · 고써레 · 평상써레 · 번지 · 밀번지 · 매번지 · 통번지 · 살번지 · 발번지 · 남태 · 돌태 · 나래 · 끌개 · 고무래 · 발고무래 · 곰방메 · 못발 등 17가지가 있다. 흙덩어리를 깨거나 바닥을 고르는 데에 쓰는 연장의 종류가 이처럼 많은 것은 우리 농지의 점토성이 매우 강함을 나타내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고써레는 안동지방에서, 여러 종류의 번지는 평안도의 건답지대에서, 그리고 남태와 돌태는 제주도에서 많이 쓴다. 평상써레에는 바닥에 이빨을 붙인 것과 칼을 달아놓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써레질이 끝나면 농사의 한 고비가 지난 것으로 여겨서, 농촌에서는 ‘써레시침(씻음)’이라 하여 특별한 음식을 장만하고 하루를 쉬는 풍속이 있다.
씨뿌리는 연장에는 종다래끼 · 다래끼 · 씨앗망태 · 잿박 · 부개기 · 씨앗통 · 자치통 · 개지 등의 8가지가 있다. 씨앗통은 북한지역에서 쓰는 연장으로 바가지에 구멍을 내어 일정량의 씨앗이 흘러 떨어지도록 만든 것이다.
자치통은 가죽이나 나무껍질 또는 종이로 원통을 만들고 이를 어깨에 멘 채 씨를 뿌리는 연장으로 역시 북한에서 쓴다. 개지는 자치통으로 뿌린 씨가 흙에 묻히도록 하기 위하여 가지가 많이 달린 소나무에 돌을 달아매고 끌고 다니는 것이다.
거름주는 연장에는 개똥삼태기 · 삼태기 · 똥바가지 · 귀때동이 · 귀사구 · 거름통 · 오줌장군 · 소매구시 · 거펑 등의 9가지가 있다. 귀사구는 전나무나 비자나무의 쪽판을 둥글게 세우고 한쪽에 귀때를 붙인 것으로 장군의 거름을 이에 옮겨담아 밭에 주는 데에 쓴다. 오줌장군은 나무로 만든 것과 오지로 구운 것의 두 종류가 있다. 거펑은 큰 전복껍데기로 제주도에서 개똥 · 소똥 · 말똥 등을 이것으로 긁어모아 밭에 준다.
매는 연장에는 호미 · 평후치 · 매후치 · 칼재메 등의 4가지가 있다. 호미는 논호미와 밭호미의 두 종류로 나뉘며, 특히 밭호미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를 보인다. 평후치 · 매후치 · 칼재메는 평안도 건답지대의 연장으로 논을 매거나 이랑을 짓는 데에 쓰며, 특히 칼재메는 가뭄의 피해를 방지하는 데에 큰 효과가 있다.
물대는 연장에는 두레박 · 맞두레 · 두레 · 용두레 · 무자위 등의 5가지가 있다. 맞두레는 목판처럼 생긴 그릇에 줄을 매고 두 사람이 마주 서서 깊은 웅덩이의 물을 퍼올리는 데에 쓰는 연장이다. 두레는 긴 통나무 끝에 물통을 달아맨 것으로 언덕진 논밭 옆에 받침대를 걸치고 노를 젓는 것처럼 하여 물을 퍼서 떠옮기는 연장이다.
거두는 연장에는 낫 · 낫걸이 · 전지의 3가지가 있다. 낫은 쓰임새나 지역에 따라 형태상에 큰 차이가 있다. 낫걸이는 낫의 날이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짚으로 주머니처럼 짠 것으로 벽에 매달아둔다.
전지는 감을 거두는 연장으로 가위처럼 끝이 벌어진 작대기에 주머니나 망태를 맨 것과, 단지 대나무장대 끝을 반으로 쪼개어놓은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뒤의 것으로는 감나무가지를 갈라진 대나무 사이에 바짝 끼워서 꺾어내린다.
곡식의 알갱이를 줄기에서 떨어내는 연장에는 벼훑이 · 개상 · 짚채 · 도리깨 · 그네의 5가지가 있다. 벼훑이에는 나무나 대 또는 수숫대로 만든 것과 화젓가락처럼 가늘고 긴 쇠꼬챙이로 만든 것의 두 가지가 있다. 어느 것이나 양틈에 벼이삭을 끼고 훑어내면 알갱이가 떨어진다.
개상에도 서까래 같은 통나무 네댓 개를 새끼로 나란히 엮고 네 귀에 다리를 붙인 것, 가위모양으로 한 끝이 벌어진 나무에 비스듬히 돌을 얹은 것, 돌을 숫돌모양으로 한쪽을 조금 높게 깎은 것 등의 여러 가지가 있으며, 곳에 따라서는 절구를 옆으로 뉘어놓고 대신 쓰기도 한다.
짚채는 평안도에서 쓰는 연장으로 가는 물푸레나 싸릿가지로 회초리처럼 만들며, 이것을 한 손에 쥐고 볏짚을 쳐서 알갱이를 떨어낸다. 그네는 빗살처럼 날을 촘촘히 세운 쇠틀로서 보리나 볏짚을 이 사이에 넣고 잡아당기면 곡식이 떨어진다.
말리는 연장에는 발 · 거적 · 얼루기 · 도래방석 · 멍석 등의 5가지가 있다. 거적은 장석이라고도 하며 짚의 수냉이를 안쪽으로 마주놓고 사이사이를 새끼로 엮은 것이다. 얼루기는 서까래 같은 나무 여러 개를 원뿔모양으로 묶고 나무의 길이에 따라 3∼5개의 테를 두른 것으로, 위에는 비가 스미지 않도록 주저리를 씌운다. 이에는 벼 · 보리 · 콩 · 조 · 밀 따위의 곡식단을 차곡차곡 재워놓고 말린다.
⑩ 고르는 연장에는 디림부채 · 붓두 · 키 · 체 · 쳇다리 · 풍구 · 바람개비의 7가지가 있다. 디림부채는 대형의 부채로 곡식을 위에서 천천히 뿌릴 때 이것을 부쳐서 검부러기 등이 날리게 한다.
붓두는 너비가 좁고 긴 자리로 가운데를 발로 밟고 양끝을 두 손에 쥐고 흔들어서 바람을 내는 데에 쓴다. 체는 쳇불 구멍의 크기에 따라 어래미 · 도드미 · 중거리 · 가루체 · 고운체 등으로 나눈다.
바람개비는 받침대에 박힌 기둥나무에 가위다리모양의 날개를 붙인 것이다. 손잡이를 돌리면 이것이 돌아가면서 큰 바람을 일으킨다.
알곡 및 가루를 내는 연장에는 돌확 · 절구 · 매통 · 토매 · 맷돌 · 매함지 · 매판 · 맷돌다리 · 맷방석 · 외다리방아 · 디딜방아 · 물방아 · 물레방아 · 연자매 등의 14가지가 있다.
매통은 굵은 통나무 두 짝이 마주닿는 마구리에 요철(凹凸)로 이를 판 것으로 위짝 가운데의 구멍으로 벼를 흘려넣고 좌우로 움직이면 겉껍질이 벗겨진다. 아래짝 가운데의 기둥은 위 아래짝을 안정시키는 구실을 한다.
토매는 앞의 매통을 진흙으로 만든 것으로 매통보다 크고 무거워서 더욱 효과적이다. 이것은 한두 사람이 노를 젓듯이 앞으로 밀었다가 당기면서 돌린다. 맷돌의 형태는 지역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영남이나 호남지방의 것은 주둥이가 길게 달렸으며 맵시 또한 아름답다. 물방아는 굵고 긴 통나무의 한 끝을 구유모양으로 우묵하게 파고 다른 한 끝에는 공이를 박아놓은 것이다.
물이 물받이에 차면 그 무게 때문에 한 끝이 내려앉으며 물이 쏟아지는 동시에 번쩍 들렸던 공이가 떨어진다. 물방아는 크기보다도 물의 양에 따라 성능이 좌우되며 겨울철에는 쓰지 못한다. 물레방아에는 물의 낙차를 이용하여 바퀴를 돌리는 것과 물이 흘러가는 힘을 이용하는 것의 두 종류가 있다.
뒤의 것은 물이 바퀴 밑으로 흐르기 때문에 이를 밀방아라고도 한다. 중국에서 들어온 디딜방아는 외다리방아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이를 양다리방아로 개량하였다. 이 방아는 세계에서 우리 나라에서만 쓴다.
나르는 연장에는 길마 · 걸채 · 발채 · 옹구 · 거지게 · 발구 · 지게 · 달구지 · 쟁기지게 · 바소거리 · 거름지게 · 망태기 · 주루막 · 다루깨 · 바구니 · 광주리 · 또아리 · 구덕 등의 18가지가 있다.
길마는 짐을 옮길 때 마소의 등에 얹는 틀이며, 걸채 · 발채 · 옹구 · 거지게는 이에 의지하여 짐을 싣는 연장들이다. 걸채와 발채는 Ⅱ자 모양의 몸채 좌우에 새끼 그물을 늘여서 만들었으며, 옹구는 큰 주머니를 달아맨 것이다.
따라서 걸채와 발채는 부피가 큰 것을, 옹구는 감자나 고구마 또는 모래나 거름 따위를 실어나를 때 쓴다. 거지게는 짧은 지게로서 길마 양쪽에 하나씩 달아매고 통나무나 돌 등을 운반할 때 쓴다. 발구는 평안도나 함경도에서 눈이 많이 쌓였을 때 쓰는 운반구이다. 긴 통나무 두 개를 나란히 놓고 한 끝을 좁혀서 멍에처럼 굽은 나무로 고정시켰으며, 다른 한 끝에는 짐이 흘러 떨어지지 않도록 달구지의 짐받침대 비슷한 것을 붙였다.
짐이 많을 때에는 몸채 뒤에 잔나무 여러 개를 가지런히 묶어서 매달고 이 위에 싣는다. 쟁기지게는 쟁기나 극젱이를 논밭으로 옮길 때 쓰는 연장이다. 지게와 비슷하나 몸채 위쪽 끝이 가위처럼 벌어졌으며 등태를 넓적한 나무로 대신하였다.
갈무리연장에는 뒤웅박 · 종태기 · 소쿠리 · 멱서리 · 멱둥구미 · 밤우리 · 통가리 · 채독 · 독 · 두트레방석 · 오쟁이 · 섬 · 중태 · 가마니 · 나락두지 등 15가지이다. 밤우리는 겨릅대를 칡으로 엮어 둥글게 둘러친 것으로 꼭대기에는 청밀짚으로 짠 용수모양의 모자를 덮는다.
산간지방에서는 삶은 도토리를 이에 갈무리하고 겨울에서 초봄에 걸쳐 조금씩 꺼내어 먹는다. 통가리는 쑥대 · 싸리 또는 뜸 등을 새끼로 엮어 둥글게 둘러치고 그 안에 감자 · 고구마 등을 갈무리하는 연장이다.
이것은 부엌 한 귀퉁이나 방 윗목에 마련한다. 채독은 싸리로 배가 부르게 독처럼 엮어 만든 그릇이다. 안에는 쇠똥을 바른 뒤에 진흙을 덧바르거나 보릿겨와 진흙의 반죽을 바르기도 한다. 이에는 보리 · 콩 · 감자 등의 마른 곡식을 갈무리한다.
축산연장에는 작두 · 손작두 · 소죽갈구리 · 소죽바가지 · 소죽통 · 구유 · 목사리 · 코걸이 · 코뚜레 · 워닝기 · 고삐 · 도래 · 워낭 · 부리망 · 빗 · 덕석 · 코줄 · 어리 · 둥우리 등의 19가지가 있다. 손작두는 큰 칼의 등 양끝에 달린 기둥에 굵은 방망이를 끼워서 손잡이로 삼은 것으로, 짚이나 풀을 한 손에 쥐고 장작을 패듯이 이것을 내리쳐서 짧게 써는 데에 사용한다. 목사리에서부터 코줄까지는 모두 소에 소용되는 기구들이다.
농산제조연장에는 뉘장 · 잠석 · 잠박대 · 잠틀 · 섶 · 잠박 · 잠망 · 돌물레 · 기름틀 · 자리틀 · 체틀 · 가마니틀 · 신틀 · 베틀 · 물레 · 씨아 · 돌겻 · 자새판 등의 18가지가 있다. 뉘장에서 잠망까지는 누에를 기르는 데에 쓰는 연장이다. 돌물레는 새끼나 노 또는 바를 단단하게 들일 때에 쓰며, 형태는 지역에 따라 큰 차이가 있다.
기타 연장에는 갈퀴 · 넉가래 · 도롱이 · 삿갓 · 메 · 말 · 되 · 비 · 바가지 · 살포 · 함지 · 태 · 팡개 · 물풀매 · 치개 등의 15가지가 있다. 도롱이는 띠[茅]나 그와 비슷한 풀 또는 볏짚이나 보릿짚으로 엮은 것으로 농촌에서 비오는 날에는 이것을 걸치고 들일을 한다. 지역에 따라 형태상에 많은 차이가 있다. 삿갓은 도롱이를 걸칠 때나 여름 더운 날씨에 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머리에 쓰는 것이다.
갈대나 대나무로 둘레를 여섯 모가 지도록 짜서 만든다. 살포는 긴 자루 끝에 작은 날을 붙인 것으로 논의 물고를 트거나 막을 때 쓰며, 노인들이 논에 나갈 때 지팡이 삼아 짚고 다니기도 한다.
태는 짚이나 삼으로 몸에 비하여 머리와 꼬리를 가늘게 꼰 것으로 한 손으로 머리를 잡고 꼬리를 휘두르다가 거꾸로 잡아채면 딱 하는 소리가 크게 난다. 이것은 새를 쫓을 때 쓴다.
팡개는 대나무 한 끝을 네 갈래로 짜개어서 십자(十字)로 작은 막대를 물리고 동여맨 것이다. 이것으로 흙을 찍어서 내두르면 흙이 멀리 나가므로 새가 달아난다.
우리네 농기구의 가장 큰 특징은 다양성에 있다. 농기구는 본디 지역환경이나 토질, 재배식물의 종류, 경작방법 등에 따라서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지만, 우리네 연장은 국토의 넓이나 풍토의 영향에 비할 수 없는 뚜렷한 다양성을 지녔다.
같은 기능을 하는 연장임에도 종류가 여러 가지이고 그 하나하나의 형태 또한 천차만별하다. 이러한 다양성은 농구가 그만큼 발달되어 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인 셈이다.
우리 농기구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쟁기의 경우, 그 명칭이 극젱이 · 소비 · 훌칭이 · 귀보 · 보연장 · 가대기 등 20여 가지가 넘으며, 날의 크기나 각도, 그리고 몸체의 형태가 다른 것이 100여 종에 이른다.
농기구의 측면에서 보면 우리의 농경문화는 쟁기중심의 문화라고 할 것이다. 땅을 삶아서 판판하게 고르거나 바닥을 다지는 데에 쓰는 연장도 써레를 비롯하여 고써레 · 평상써레 · 번지 · 밀번지 · 매번지 · 통번지 · 살번지 · 발번지 · 남태 · 돌태 · 끙게 · 나래 · 못발 · 곰방메 · 고무래 · 발고무래 등 17가지나 되며, 끙게 하나만 해도 형태가 매우 다른 것이 10여 종 포함된다.
논밭을 매는 호미도 날의 크기나 각도 그리고 자루의 길이에 따라 100여 종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특히 함경도지역에서는 날이나 자루가 괭이와 비슷한 것을 사용하기도 한다. 지게도 예외는 아니다. 지역에 따라 몸체의 크기가 다르고 세장의 수도 일정하지 않으며 등태를 엮는 방법 또한 다양하다.
도서지방의 지게 가운데에는 등태를 달지 않은 것이 있으며, 전북특별자치도의 일부지방에서는 쟁기를 옮기기 위하여 쟁기지게를 따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우리 농기구의 다양성은 종류나 형태뿐만 아니라 부분 명칭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먼저 부분명칭을 5개 이상 지닌 농기구를 들어보면 베틀 32가지, 달구지 16가지, 쟁기 14가지, 지게 9가지, 연자매와 갈퀴가 8가지, 디딜방아 7가지, 써레 · 씨아 · 길마 · 낫이 각각 5가지씩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풍부한 부분명칭 가운데 기본적인 것을 제외한 대부분은 일개 도(道) 정도의 범위를 벗어나는 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많으며, 어떤 것은 같은 도 안에서도 다르게 불리기도 한다.
우리 농기구의 이와 같은 다양성은 농경조건의 영향 외에 연장 하나하나를 사람들이 직접 만들어 썼던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우리네 연장만큼 만든 이의 개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도 매우 드물 것이다. 예전의 농군은 농사짓는 일뿐만 아니라 농기를 만드는 일에도 열심이었으며, 그것은 곧 그들의 생활의 일부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지게 한 틀을 쳐내면서도 어느 조각가 못지않은 기쁨과 보람을 맛볼 수 있었으며, 이들을 자기의 분신처럼 여겨서 깨끗하게 보존하고 귀하게 다루었고 연장을 고루 갖추려고 애썼다. 우리 농기구가 형태상의 다양성 못지않게 풍부한 부분 명칭을 지니고 있는 것도 연장에 대한 지극한 애착심의 결과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재래농기구가 사라져가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부분 명칭마저 없어지고 있는 것은 겨레말의 장래를 위해서도 안타까운 일이다.
다른 문화와 마찬가지로 농경문화도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며, 이들은 일본 농업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으로 건너간 우리 농기구에 대한 일본측 기록이나 저술 내용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농기구의 일본 전래 사실을 전하는 가장 오랜 기록은 ≪일본서기 日本書紀≫이다.
이에 따르면 스이코왕(推古王) 18년(610)에 고(구)려의 승려 담징(曇徵)이 건너와서 연마(碾磨)를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연마는 맷돌로 생각되는데,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선진 연장을 가르쳐주었으리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기무라(木村靖二)는 그의 ≪일본농업발달사≫에서 일본 농기구 가운데 ‘가라’라는 말이 붙은 것은 모두 조선에서 온 것이라면서 쟁기 · 괭이[鋤] · 키 · 도리깨 · 맷돌 · 디딜방아 따위를 보기로 들었다. 이누마(飯沼二郎)는 그의 <일본농업에 끼친 조선문화>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가래[鍬]를 ‘구와’로, 괭이를 ‘스키’로 읽는 발음은 중국 본래의 것과 반대인바, 이것은 8세기경 조선에서 유입된 괭이와 쟁기의 영향 때문이다. 조선문화에는 독자성이 없으며 단지 일본에 중국문화를 전해준 통로 구실을 하였을 뿐이라고 하는 이가 있으나 이는 잘못이다.
말굽형따비와 쇠스랑이 그 증거이다. 따비는 5세기경 일본으로 들어왔으며, 758년 정월의 첫 쥐날 고켄왕(孝謙王)이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이른바 ‘자일수신서(子日手辛鋤)’도 그 하나이다.
메이지시대(明治時代) 초기 농업혁명을 일으키려고 하였을 때 심경(深耕)에는 괭이보다 쟁기가 유리하다는 외국인의 권고가 있어 일본 전국을 뒤졌으나 이에 적합한 것은 후쿠오카현(福岡縣)에서 쓰던 무상리(無床犁)뿐이었다.
그런데 이 쟁기는 조선과 가까운 구주지역(九州地域:佐賀 · 島根 · 隱岐島 · 長崎縣 · 五島列島)과 고대에 조선사람이 많이 이주해와 살던 지역(千葉 · 神奈川 · 群馬 · 岐阜縣)에 남아 있었다.”앞에서 설명한 대로 이 쟁기는 우리 나라에서 건너간 것으로 생각된다.
아라시(嵐嘉一)도 ≪이경의 발달사 犁耕の發達史≫에서 우리 쟁기의 일본 전래 사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의 무상리는 대한교통(對韓交通)이 편리한 지역(肥後北部를 포함하는 北九州 · 山陰地方)과 도래계(渡來系) 조선인의 집단이주가 이미 7, 8세기에 이루어진 관동지방(關東地方)에 분포한다. 조선의 이경술(犁耕術)은 우리보다 발달하였으며, 조선 북반부의 쟁기는 소 두 마리가 끌 정도로 크고 중부 이남에는 한 마리가 움직이는 작은 것이나 일본쟁기는 이보다 더 작다. 따라서 일본의 무상리는 그 원류가 조선이고 장상리(長床犁)는 중국이라고 하겠다.”
그런데 무상리가 우리 나라에서 일본으로 전래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장상리는 중국에서 왔다는 견해에는 큰 무리가 따른다. 장상리가 본디 중국 화북지방의 연장인 것은 사실이나 이것도 우리 나라에서 널리 쓰였기 때문이다.
니노가베(二甁貞一)도 그의 저서 ≪농기구금석 農機具今昔≫에서 장상리는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조선에서 구주 및 기내지방(畿內地方)에 들어왔다고 하였다.
이와(礒具勇)는 그의 논문 <지게-등짐운반과 그 용구->에서 우리 나라 지게의 일본 전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일본지게에는 사다리꼴의 틀만 있을 뿐 가지가 달리지 않은 것[無瓜型]과 가지가 있는 것[有瓜型]의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그리고 뒤의 것 가운데에는 자연목의 가지를 그대로 이용한 것과 다른 나무를 깎아서 끼운 것이 있는데, 앞의 것의 원류는 조선이다. 가지달린 지게는 일본 여러 곳(島根 · 廣島 · 山口 · 長崎 · 大分 · 宮崎 · 鹿兒島縣)에 널리 퍼져 있으며, 일부지방(中國 · 四國 · 九州)에서는 이를 ‘조선오이코’ · ‘조선가루이’라 부르며 조선이름 그대로 ‘지게’라 하는 곳도 있다.”
가지달린 유과형 지게뿐만 아니라 무과형 지게도 우리 나라에서 건너갔다. 가지를 다른 나무로 박아 쓰는 지게는 전북특별자치도 서반부, 곧 김제 · 부안 · 고창 등지에 분포하고 있다. 한편 대마도에서는 이를 우리말 그대로 ‘지게’ · ‘지께이’라고 부른다. 특히 이 섬은 우리 문화 전파의 징검다리 구실을 한 곳이어서 농기구의 대부분이 우리 나라 남부지방(특히 호남지방)의 것과 매우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