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제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승정원동부승지, 형조참판,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희중(希仲)
입암(立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493년(성종 24)
사망 연도
1549년(명종 4)
본관
여흥(驪興, 지금의 경기도 여주)
주요 관직
승정원주서|춘추관기사관|성균관사성|호조참의|승정원동부승지|형조참판|우찬성
관련 사건
을사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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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전기에, 승정원동부승지, 형조참판, 우찬성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희중(希仲), 호는 입암(立巖). 민충원(閔冲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사간 민수(閔粹)이고, 아버지는 전적(典籍) 민구손(閔龜孫)이며, 어머니는 김효진(金效震)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0년(중종 1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호당(湖堂)에서 독서하다가 이듬해 승정원주서로 탁용되었다. 그러나 이때 「척간유생도기(擲奸儒生到記)」를 가필했다고 해서 탄핵을 받아 잠시 물러났다.

김안로(金安老)가 물러난 1525년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다시 등용되어 사필(史筆)에 종사하였다. 1528년 사간원정언을 거쳐, 1531년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서 성균관사성으로 승진했으며, 이때 문신 제술시(文臣製述試)에서 수석을 차지하였다.

1536년 호조참의를 거쳐 홍문관부제학·사간원대사간을 역임하고, 1538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다. 이때 국왕의 명을 받아 「구언전지(求言傳旨)」를 지어 올렸다. 승정원에서 3년 봉직한 뒤, 1541년 외직으로 나가 평안도관찰사가 되었고, 이어서 사헌부대사헌·형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중종이 승하하자, 고부청시청승습사(告訃請諡請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종 때 사헌부대사헌을 다시 역임하였다. 명종 즉위 초 을사사화가 발생했을 때 대사헌과 호조판서를 역임하며 윤임(尹任) 일파의 처단에 관여하였다.

이 공로로 추성위사홍제보익공신(推誠衛社弘齊保翼功臣) 2등에 책록되고 여원군(驪原君)에 봉해졌다. 보익공신에 책록되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을사사화에 가담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이로 인해 민제인은 한때 을사사화를 일으키는데 앞장섰다는 오명을 쓰기도 했다.

『명종실록』을 보면, 윤원형(尹元衡)과 함께 윤임 일파를 몰아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이기(李芑)·임백령(林百齡)·정순붕(鄭順朋) 등으로 확인된다. 민제인은 당시 대사헌으로서 언로를 모으는 역할을 했고 결과적으로 을사사화에 일정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정왕후가 밀지를 내려 윤임 일파를 제거하려고 할 때 민제인은 그 내용을 사헌부, 사간원의 동료들과 의논한 끝에 결론을 내리지 않고 모임을 파하였다. 임금이 윤임을 과거의 허물로 대하지 않았는데 이를 대간(臺諫)에서 발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이 이유의 하나였으며, 정상적인 절차가 아니었기 때문에 훗날의 폐단이 될 수 있다는 동료들의 우려가 또 다른 이유였다.

문정왕후가 정승들과 주요 대신을 불러 모아 윤임의 죄를 재차 추궁하자, “죄상이 비록 크지만 살리기 좋아하는 것은 임금의 미덕입니다.”라고 하며 윤임의 처벌에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민제인의 이러한 성품과 태도는 민제인를 파직시키는데 앞장섰던 윤원형의 말에서도 확인된다. 윤원형은 민제인의 처벌을 주청하는 자리에서, “성품이 본래 자상하기 때문에 대개 죄를 정할 때마다 가벼운 쪽을 따르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의 동료들은 그를 지목하여 자비승(慈悲僧)이라 하였습니다.”라고 할 정도로 온화한 성품만은 인정하였다.

최종적으로 윤임 일파에 대한 논죄가 정해졌을 때 사관(史官)은, “이언적·정옥형·윤개·민제인·나세찬 등 5∼6인은 슬픈 안색이었고 나머지는 웃고 떠들면서 평일과 다를 것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일신을 돌보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노모가 계시기 때문이라는 하소연처럼 민제인은 을사사화라는 정치적 격변기에서 많은 고뇌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민제인의 이러한 슬픔과 회한은 결국 윤원형 일파가 을사사화를 은폐하기 위해 안명세(安名世)를 죽이고 시정기(時政記: 실록 편찬의 기본 자료)를 고치려 할 때 그 불가함을 역설하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마침내 녹훈이 삭제된 채 공주로 유배를 떠났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유배를 떠나기 전까지 병조판서·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1547년(명종 2) 좌찬성에 올라 진휼사(賑恤使)를 겸임하며 민심 안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문장과 역사에 능통했으며, 저술로는『입암집(立巖集)』 6권,『동국사략(東國史略)』 등이 있고, 공술(共述)한 것으로는『동몽선습(童蒙先習)』이 있다.

참고문헌

『중종실록(中宗實錄)』
『인종실록(仁宗實錄)』
『명종실록(明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유분록(幽憤錄)』
『노봉집(老峯集)』
『우암집(尤菴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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