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회 ()

근대사
단체
재일 한국인 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지부로서 1924년 11월 25일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운동단체.
정의
재일 한국인 사회주의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지부로서 1924년 11월 25일에 서울에서 조직되었던 운동단체.
개설

김약수(金若水)·김종범(金鍾範)·마명(馬鳴)·정운해(鄭雲海)·남정철(南廷哲)·서정희(徐廷禧)·박창한(朴昌漢)·박세희(朴世熙)·신용기(辛容箕, 일명 辛鐵)·송봉우(宋奉瑀)·이호(李浩) 외 13명의 주동으로 재일(在日) 사회주의 단체인 북성회(北星會)의 국내 지부로서 성립되었다. 이에 앞서 1921년 11월 재일 한국인 20여 명이 모여 재일 한국인 사회주의 운동단체의 효시인 흑도회(黑濤會)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흑도회는 창립된 그 해 12월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박렬(朴烈)파와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김약수파의 대립으로 해산되었다.

해산 후 김약수 일파는 1923년 1월 일본 동경에서 사회주의 사상단체인 북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의 구성원은 김약수·김종범·송봉우·변희용(卞熙鎔)·김장현(金章鉉)·이여성(李如星) 등 60여 명이었다. 동경에 본부를 둔 북성회는 자파의 인물들로 국내의 사회주의단체를 장악하려 하였다. 사회주의 사상보급을 위한 전국 순회강연은 그러한 노력의 일단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국내의 유력한 청년·사상단체인 서울청년회와의 반목의 계기가 되어, 북성회는 국내 단체를 계통적으로 지휘하기 위한 최고 기관을 설치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에 따라 1923년 10월서울 재동(齋洞)에서 김약수·김종범·마명·이헌(李憲)·김재명(金在明) 등 160여 명이 모여 건설사(建設社)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이를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924년 11월 북풍회가 결성되었다. 북풍회는 창립과 동시에 코민테른의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관 책임자 인데르슨에게 한국의 유일한 사회주의자 통일전선임을 과장해서 보고하였으나 승인받지 못하였다.

설립목적

북풍회라는 명칭은 ‘북풍이 한번 불게 되면 빈대나 모든 기생충이 날아가버린다.’는 속언에 근거한 것이었다. 여기서 북풍은 마르크스주의 혹은 사회주의 이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고 당시의 국내 군소 단체를 북풍회의 위력으로 통일한다는 의미였다. 북풍회는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목표 실현을 위해서는 한일무산자계급(韓日無産者階級)의 관계가 유기적으로 강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연원 및 변천

북풍회는 한국 내의 사상단체 중에서 일본 사회운동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 점은 화요회(火曜會)와 반목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고, 내부에서도 주류·비주류로 갈려 갈등을 겪게 되었다. 또한 서울청년회와의 반목도 심각하였다. 그래서 화요회와는 잠정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함께 서울청년회에 대항하였다. 북풍회는 1925년 3월 임시총회를 열고 화요회와의 합동을 결의하였다.

그런데, 이 두 단체가 합동한 배경에 대해서는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성립시키려는 화요회의 공작이 주효하였다고 하는 주장과 사회주의 내부의 파벌 불식이라는 대세론(大勢論)에 의한 합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 합동에 이어서 화요회·북풍회·조선노동당·무산자동맹회로 구성된 4단체 합동위원회가 구성되었다. 김약수를 비롯한 북풍회의 주요 인물들은 1925년 4월, 화요회의 주도 아래 결성된 조선공산당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북풍회와 화요회 사이에는 합동 뒤부터 반목이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1925년 9월 8일자 『조선일보』 사설인 「조선과 노국(露國)과의 정치적 관계」를 둘러싸고 두 단체의 밀월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한편, 코민테른은 화요회 주도의 조선공산당을 정식 승인한 반면 북풍회와 서울청년회 등은 공산단체로서만 인정하였다. 그러나 이들 단체의 활동이 조선공산당을 능가할 때는 새로운 당을 만들 것이라는 결정이 있자 북풍회와 화요회와 서울청년회의 반목은 더욱 깊어졌다.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이 조선에서도 실시되자 민족주의자들이 우세하게 되었고, 여러 차례의 공산당 검거로 사회주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동시에 민족협동전선론이 대두되자 북풍회는 1926년 4월 14일에 이르러 정우회(正友會)로 발전적 해체를 보았다.

의의

북풍회는 결성 이후 다방면에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아갔지만, 국내 사회주의 계열의 난립에 대한 통합 움직임, 일제의 치안유지법 실시 등 사상탄압 강화,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진영의 민족협동 전선 모색 등 새로운 국면을 접하고 있었다.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양 진영의 민족협동전선이 무르익은 시점에서 국내 사상운동 단체의 파벌지양과 대동단결이라는 대의를 받아들인 것이다. 북풍회에 합류하기 이전까지 국내 사회주의운동, 특히 1920년대 초반부터 중반까지 화요파, 서울청년회와 더불어 두드러진 영향력을 미친 단체 중의 하나였음은 분명하다.

참고문헌

『한국공산주의운동사(韓國共産主義運動史)』2(김준엽·김창순, 고려대학교아세아문제연구소, 1969)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청년운동과 고려공산청년회」(박철하, 『역사와 현실』 9, 1993)
『동아일보(東亞日報)』
『現代史資料』 29(姜德相·梶村秀樹 編, みすず書房, 1972)
『朝鮮獨立運動』Ⅴ(金正明 編, 原書房, 1967)
『治安槪況』(京畿道警察部,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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