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용회(用晦), 호는 인재(仁齋). 민부상서 성여완(成汝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보문각대제학 성석용(成石瑢)이고, 아버지는 관찰사 성개(成槪)이며, 어머니는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박가실(朴可實)의 딸이며, 처부(妻父)는 호조판서 이견기(李堅基)이다.
학식과 덕망으로 천거되어 한성부참군(漢城府參軍)에 제수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가 되었다. 1452년에 정인지(鄭麟趾) 등과 함께 『세종실록(世宗實錄)』을 편찬하고 이어 1454년(단종 2)에는 『문종실록(文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456년(세조 2) 당질(堂姪: 5촌 조카)인 성삼문(成三問) 등 사육신이 상왕인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처형당할 때 연루되어 10여 차례나 극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김해로 귀양갔다가 3년 뒤에 풀려나 공주 달전에 돌아왔으나 비분한 마음에 병이 되어 죽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고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인재집(仁齋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