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석기시대는 구석기시대 다음 시대로 농경과 정주, 토기, 마제석기, 궁시 등을 주요 문화적 지표로 하는 시대이다. 최종 빙하기가 끝나가는 무렵, 환경 변화에 적응한 신석기인은 기술혁신을 통해 생업 형태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계 방식, 생업 도구, 의식주, 분묘, 신앙 의례, 장거리 교역 등과 같은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였다. 신석기 문화는 자체적인 변화·발전 과정을 거쳐 도작농경과 무문토기를 주체로 하는 청동기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종말을 맞이한다.
최종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인 전신세로 이행하는 과정에 전 지구적인 기후 변동으로 온난화가 진행되어 자연환경에 많은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환경 변화로 수백만 년간 지속된 구석기시대는 종말을 맞이하고 농경과 정주, 토기, 마제석기[간석기], 궁시 사용을 주요 지표로 하는 새로운 문화가 세계 각 지역에서 나타난다. 이것이 인류사 전개 과정에서 구석기시대 다음으로 오는 신석기시대이다.
신석기시대는 인류가 변화된 환경에서 이전과 다른 생활양식과 삶의 방식을 통해 "자연적 질서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인간적인 질서 구축"에 착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석기시대는 19세기 중엽 영국의 러복(J. Lubbock)이 자신의 저서 『Prehistoric Times』(1865년)에서 톰센(C. J. Thomsen)의 선사시대 3시기 구분 중 석기시대를 타제석기[뗀석기]를 사용하는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를 사용하는 신석기시대로 분리하면서 인류사의 시대 구분명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러복은 신석기의 문화적 특징으로 마제석기, 동식물의 가축화와 작물화, 토기 사용을 제시하였다. 이후 영국의 고고학자 고든 차일드(V. Gordon Childe)가 마제석기가 아닌 식량 생산, 즉 농경의 개시를 신석기시대의 핵심 기준으로 설정하고, 사회 발전에 있어서 새로운 문화의 진전[수렵채집사회에서 농경사회로의 전환]이 급격하게 이루어진 시대라는 의미로 신석기혁명이라는 개념을 제안하면서부터 신석기시대 이미지와 개념은 보다 구체화되었다.
현재 서구를 중심으로 사용하는 신석기시대의 일반적 정의는 농경을 생산경제의 중심축으로 두고, 마제석기와 토기 등을 주요 물질적 표상으로 새로운 문화가 전개된 시대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화적 속성들은 출현 시점이 동일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농경 역시 지역에 따라 시차를 가지고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다는 점, 토기 사용과 농경 발생이 동시기에 성립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서구의 개념을 모든 지역에 적용시키는 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최근에는 신석기시대 개념과 시작을 전통적인 관점과는 다른 시각에서 보기도 한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일본, 중국, 러시아 연해주 등 동아시아 주요 지역에서는 농경 대신에 인류의 식생활에 획기적인 변화를 야기한 토기 출현과 사용을 핵심 키워드로 신석기시대를 규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제석기, 정주, 농경은 신석기시대[사회]를 정의하는 주요 속성임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전신세로 이행하는 과정에 빗살무늬[즐문]토기를 중심으로 마제석기와 궁시를 사용하고 정주 생활을 통해 수렵, 어로, 채집, 농경으로 생업 경제를 유지한 시기(서기전 10000년 전후)부터 청동기시대 민무늬[무문]토기 문화가 출현하는 서기전 1500년 전후한 시기까지를 신석기시대로 규정하고 있다.
한반도 신석기시대의 성립기 양상은 일본, 중국 등 주변 지역과 달리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뿐만 아니라 세석기 문화를 특징으로 하는 선주민인 후기 구석기인과의 관계와 신석기 문화로의 전환 과정도 분명하지 않다. 그 원인은 초기 신석기 유적의 미발견과 자료 부족에 기인한다.
최근 들어 일본 열도, 아무르 중하류, 연해주, 중국 남부 지역 등 동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서기전 1만 5천 년을 전후한 갱신세 말기에 토기가 구석기 전통을 갖는 석기군과 함께 출토되고 있다.
한반도에서는 토기는 출토되지 않지만, 신석기 문화의 특징적 요소인 화살촉과 구석기시대 종말기의 세석기, 양면찌르개[유경첨두기] 등이 서두리, 오지리, 기곡, 월소, 화대리, 재너머들 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 볼 때 한반도는 적어도 서기전 1만 년 무렵에 신석기화 과정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신석기인은 한반도 전역에 거주하면서 수렵과 어로, 농경, 채집, 교류[교역] 등 다양한 생업 활동을 통해 생계 영역을 확대하고 신석기 문화[즐문토기 문화]를 전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 문화는 자체적인 변화 · 발전 과정을 거쳐, 도작 농경과 무문토기를 주체로 하는 문화가 유입됨에 따라 종말을 맞이한다.
신석기 문화는 구석기 문화와 비교할 때 여러 가지 면에서 다른 특징을 보인다. 특히 기술혁신을 통한 생업 형태의 다변화와 더불어 생계 방식, 생업 도구, 의식주, 분묘, 신앙 의례, 장거리 교역 등은 새로 나타나는 문화 요소이다. 신석기 문화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이러한 지표들은 개별적으로 혹은 복합적으로 상호작용하여 구석기시대와 다른 사회 시스템을 만들었다.
신석기 유적은 현재까지 발굴, 지표조사, 그리고 미발표된 자료를 포함하면 1,000여 개소에 달한다. 신석기인이 남겼던 유적은 주거지[취락], 패총, 분묘, 야외생활 시설[노지, 집석유구], 동굴[암음] 유적, 의례[제사] 유적, 야영지[한정 행위 장소], 저장 시설, 석기 제작장, 토기 가마, 토취장, 유물 산포지 등의 형태로 남아 있으며, 지역에 따라 유적 분포, 종류, 성격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해안 지역은 패총이 우세하며, 내륙과 산간지대는 주거지[취락], 동굴 유적, 암음 유적 등이 많은 편이다. 유적은 해안과 도서 지역, 한강, 낙동강, 대동강, 두만강 등 큰 강과 중소 하천변에 주로 입지한다. 해안 지역의 경우는 자원 획득과 생업 활동에 유리한 남해안과 서해안 지역에 많은 유적이 분포하며, 내륙 지역은 유적 수와 밀도는 적은 편이다.
신석기인은 새로운 문화적 환경에 적응하면서 생업 활동에 적합한 각종 도구를 사용하고 이를 기술적으로 발전시켰다. 생산력을 증대시키고 효율적인 식량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이나 동물 뼈, 조개껍질 혹은 교역을 통해 획득한 흑요석 같은 소재를 이용하여 일상생활과 생업 활동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만들었다.
도구는 생업 형태와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생업 활동에 직접 관계하는 도구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도구는 쓰임새에 따라 크게 수렵용 · 어로용 · 채집 농경용 · 일상용구 등으로 나누어진다.
수렵 · 어로용으로는 화살촉 · 창 · 작살 · 결합식 낚시바늘 · 그물추 · 빗창이 있으며, 식물 채집 및 농경용으로는 타제석부 [따비, 괭이] · 갈돌 · 갈판 · 돌낫 등이 있다. 그 밖에 목재를 벌채하고 가공하기 위한 각종 마제석부류[간돌도끼류]와 식료 가공 및 의복 제조에 필요한 석도(石刀)․ 조개칼 · 뼈바늘 · 방추차 · 가락바퀴 · 뚜르개[석추] · 긁개 · 토기 등은 일상도구로 사용되었다. 생업 도구는 아니지만, 조개가면 · 토우 · 골우 등의 주술 의례구와 귀걸이 · 수식 · 조개팔찌 등의 장신구도 만들었다.
신석기시대는 지역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토기 문화를 기준으로 대략 초창기, 조기, 전기, 중기, 후기, 말기의 6단계 발전 과정을 거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 문화의 초창기는 주변 지역과 마찬가지로 갱신세 말기에서 전신세로 전환하는 무렵의 어느 시기로 추정된다. 현재 발굴된 가장 이른 초창기 유적은 제주 지역의 제주 고산리 유적이며, 그 연대는 서기전 7500년 전후이다. 이후 초창기는 조기의 융기문(隆起文)토기 문화가 시작되는 서기전 6000년 무렵까지 지속한다.
조기는 남부 지역의 융기문토기[동삼동식토기]를 비롯하여 동해안의 죽변, 오산리, 서포항 하층식토기가 유행하는 서기전 6000년부터 서기전 4500 무렵까지이다. 전기는 영선동식토기와 구분문(區分文)계토기인 암사동식토기 등이 출현하는 서기전 4500년 무렵부터 서기전 3500년까지이다.
중기는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서기전 3500년에서 서기전 3000년 전후, 후 · 말기는 서기전 3000년 전후부터 청동기 문화가 등장하는 서기전 1500년 무렵까지이다.
한반도 신석기 문화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상과 특징을 보인다. 특히 토기 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성이 두드러지는데, 크게 5개 권역으로 구분된다. 이들 지역의 즐문[빗살무늬]토기 문화는 주변 문화권과 상호 교류하거나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자체적인 전개 과정을 거친다.
즐문토기는 빗살무늬토기, 유문(有文)토기, 기하문(幾何文)토기, 새김무늬토기 등으로도 불리며,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물질적 표상 중의 하나이다. 토기 사용은 가식 식물의 범위 확대와 새로운 조리법의 획득이라는 측면에서 신석기인의 생활양식과 식생활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다.
다양한 기종과 문양이 시문된 즐문토기는 타문화권의 신석기 토기와 차별화되는 특징을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의 계통과 편년, 사회 변화상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그러나 즐문토기가 언제 출현하고 그 문화적 계통은 어느 지역과 연결되는지 그리고 토기 변천 과정과 지역별 양상 등에 대해서는 아직 불투명한 점이 많다.
그러나 한반도 주변의 동아시아 초창기 토기 문화로 보아 적어도 서기전 1만 년 전후한 시기에는 한반도에 즐문토기가 출현하여 각 지역으로 확산해 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토기는 서기전 7500년 전후의 절대연대를 갖는 제주 고산리 유적의 유기질혼입토기[고산리식토기]이다.
한반도를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 서기전 15000년~서기전 10000년의 연대를 갖는 고식 토기가 분포하는 점을 고려하면 고산리식토기보다 이른 시기의 새로운 토기가 발견될 것으로 예상된다.
즐문토기는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한 양상과 특징을 보인다. 특히 토기 기형과 문양의 형식[양식]적 특징을 중심으로 크게 압록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 지역, 두만강 유역의 동북 지역, 대동강 및 한강 유역의 중서부 지역, 강원 영동의 중동부 지역, 내륙과 남해안, 제주도를 포함하는 남부 지역의 5개 지역군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들 지역의 즐문토기는 지역색을 가질 뿐만 아니라 다양한 교류 활동을 통해 타 지역의 토기 형식[양식]을 공유하면서 자체적인 변화 과정을 거친다.
즐문토기는 전체적인 흐름과 지역적인 변천 과정에 불확실한 점도 많다. 그러나 토기 변화상이 비교적 뚜렷한 남부 지역의 토기 연대와 형식[양식]적인 큰 틀을 기준으로 볼 때 고산식토기를 중심으로 하는 초창기 토기에서 융기문과 압날문토기를 표식으로 하는 조기, 자돌(刺突) · 압인(押引) · 압날(押捺) · 구분문계토기로 대표되는 전기, 침선(沈線)문이 지표인 중기, 침선문의 퇴화, 무문양화, 이중구연(二重口緣)토기를 특징으로 하는 후 · 말기 토기로 변천해 간다.
신석기인의 생업 형태는 거주 지역 환경이나 사회 ·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지역과 시기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수렵 · 어로 · 채집 농경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직접적으로 생산에 관계하지 않지만, 식량 획득에 간접적인 효과나 영향을 주는 교역과 생업 활동의 안전과 동식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행위도 포함할 수 있다.
수렵은 인간에게 양질의 단백질을 제공하고, 뼈나 뿔, 이빨, 가죽 등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를 만드는 재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생업 활동의 주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수렵 대상은 패총에서 출토되는 동물 유존체를 통해 볼 때 호랑이 · 표범 · 곰 · 사슴 · 멧돼지 · 고라니 · 노루 · 오소리 · 너구리 · 수달 등의 중소형 동물이었다. 특히 사슴과 멧돼지의 비중이 높은 것으로 보아 이들이 수렵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렵 방법 내지 도구는 다양했을 것으로 생각되나 먼 거리에서도 사냥을 할 수 있는 활과 근거리용인 창 등이 주로 이용되었다. 이 밖에 민족지 등의 사례로 보아 올가미나 함정, 덫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로 활동은 한반도 신석기 문화를 특징짓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이며, 생업 유형 가운데 차치하는 비중은 매우 높았다. 이를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것이 해안과 도서 지역에 형성된 패총 유적이다. 어로 행위에 관한 가장 오래된 고고학적인 증거는 서기전 6000~50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부산 동삼동 패총을 비롯하여 울산 신암리와 세죽, 동삼동, 비봉리, 문암리, 오산리, 죽변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다.
여기서 출토된 결합식 낚시바늘[조침]과 작살, 그물추, 통나무 배 등은 어로 행위를 보여 주는 구체적인 증거이다. 어로 활동은 작살업, 낚시업, 어망업, 함정어업, 패류 채취업으로 구분된다. 각종 어류와 해수류를 포획하기 위해 다양한 어로구를 사용하는데, 그물[어망추], 조침, 작살, 빗창 등은 대표적인 어로구이다.
남해안 패총에서 출토되는 각종 어패류와 상어 · 방어 · 다랑어 · 물개 · 강치 · 돌고래 · 고래 등의 외양성 어종과 해수류는 신석기인이 먼 바다까지 진출하여 어로활동을 하였음을 보여 준다.
구석기시대 이래 지속되어 온 채집 활동은 수렵 · 어로 못지않게 중요한 생계 수단이었다. 채집 활동은 수렵 · 어로에서 확보하기 어려운 여러 가지 식물성 식재료를 획득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신석기 전 기간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
채집된 식용 식물은 주변에 구할 수 있는 도토리나 가래, 호두 등의 견과류와 근경류 등이 주류를 이룬다. 전기부터 중서부 지역에서 시작된 조, 기장을 중심으로 한 잡곡 농경은 생업 경제에 보조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신석기인의 먹거리는 다양해지고 한층 풍부해졌다. 식물 채집과 농경 활동에 이용된 도구는 굴지구[타제석부, 곰배괭이]와 낫, 석도, 갈돌, 갈판 등이 있다.
신석기인은 주로 자연 동굴을 이용한 구석기인과 달리 생업 활동에 적합한 다양한 형태의 주거시설과 취락을 조성하여 일상생활을 꾸려나갔다. 서기전 5500년 전후에 형성된 중부 동해안 지역의 양양 오산리와 고성 문암리 유적의 주거지가 지금까지 발굴된 자료 중에서 가장 이른 주거지이다. 최근에는 제주 고산리 유적에서 초창기 수혈주거지가 발굴되었으나 주거 형태와 구조에 의문을 제기하는 견해도 있다.
주거 형태는 대부분 수혈주거 [움집]의 구조를 갖는다. 소수이지만, 오산리 유적의 경우와 같이 지상식 구조를 하는 것도 있다. 이 밖에 제천 점말, 영월 쌍굴, 단양 상시, 청도 오진리, 부산 율리 유적 등과 같이 자연적으로 형성된 동굴과 암음[바위그늘]을 주거 공간으로 이용하기도 한다. 암음 주거는 일반 취락 내 주거와 달리 수렵이나 어로 등 특정한 행위를 위해 일시적으로 거주한 장소로 추정되나 그 사례는 많지 않다.
수혈주거지는 50~100㎝ 정도의 깊이로 구덩이를 파고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위에 이엉이나 갈대 등으로 지붕을 이어 만든 형태인데, 평면 구조와 기둥 배치에 따라 원형, 방형, 장방형, 타원형으로 구분된다. 주거 구조와 규모는 용도나 혹은 지역과 시기에 따라 다양하며, 규모는 4~7m 정도가 일반적이다.
주거 내부에는 음식물 조리, 난방, 조명을 위한 화덕(爐址)이 마련되어 있으며, 구조에 따라 돌을 돌린 위석식과 지면을 얇게 판 수혈식이 있다. 출입 시설은 보통 계단식 혹은 경사진 구조를 가지며, 일부 주거 형식에서는 길게 뻗어 돌출된 복도식의 출입구 시설도 확인된다. 이 밖에도 선반과 저장 시설 등이 내부에서 확인된다.
대표적인 주거 유적으로는 서울 암사동 유적을 비롯하여 웅기 서포항, 양양 오산리, 고성 문암리, 황해도 지탑리, 안산 신길동, 시흥 능곡동, 인천 운서동, 금릉 송죽리, 진주 상촌리, 평거동, 부산 동삼동 유적 등이 있다.
개별 주거가 군집을 이루어 형성된 취락[마을]은 보통 강변의 충적대지, 구릉의 정상과 사면에 있다. 해안 지역의 경우는 바닷가에 접한 구릉 사면이나 석호 주변의 사구 지대에 입지한다.
조기 단계는 문암리, 오산리 유적의 예로 보아 510동 정도의 주거로 구성된 소규모 취락이 생업 활동에 적합한 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전기가 되면 중서부의 경기 해안과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2030동 규모의 대규모 취락이 형성되는데, 대표적인 취락이 암사동과 운서동, 대능리 유적이다.
전기 이후는 규모에 차이가 있으나 이러한 형태의 취락은 중기까지 이어진다. 후 · 말기 단계에는 규모가 큰 취락도 일부 존재하지만, 전반적으로 주거 수가 줄어들고 취락 규모가 축소되는 경향을 보인다.
신석기인의 식생활에 대한 정보는 주로 패총 유적 등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동식물 유존체나 식량 자원을 획득하는 도구, 조리 및 보관시설 등을 통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계절에 따라 주변에서 안정적으로 구할 수 있는 도토리, 가래, 살구 등의 나무 열매와 식용 가능한 종실류와 근경류, 수피류 등의 야생식물을 채집하여 먹거리로 활용하였다. 특히 영양가와 칼로리가 높은 도토리는 신석기시대 이른 시기부터 주요 식료원으로 사용되어 갈돌 · 갈판으로 제분하거나 익혀 먹었다. 창녕 비봉리와 울산 세죽 유적에서 발굴된 다량의 도토리와 저장 구덩이는 당시 사람들의 식료 관리와 식생활의 일면을 잘 보여준다.
신석기 전기부터 잡곡 농경이 전국적으로 널리 보급되면서 조, 기장, 콩, 팥 등은 새로운 식단에 추가되었다. 조, 기장 등이 재배되면서 식생활에도 변화가 일어났지만, 해안 지역의 경우는 주 식료의 보조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식물성 먹거리 이외에 부족한 단백질은 수렵과 어로를 통해 확보한 어패류와 사슴, 멧돼지 등의 동물성 식료를 섭취함으로써 해결하였다. 해안 지역에 거주한 신석기인은 고래 · 돌고래 · 상어 · 강치 · 물개 · 다랑어 · 대구 · 방어 · 숭어 · 정어리 · 참돔 등을 포획하거나 굴과 홍합 · 성게 · 소라 · 고둥류를 채취하여 식량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해안의 암초 지대에서 쉽게 채취할 수 있는 굴과 홍합은 신석기인이 즐겨 먹었던 해산물이다.
수렵과 어로, 농경 활동을 통해 확보한 어패류와 육류, 식물성 식료는 주로 토기에 담아 삶거나 집석유구[화덕 시설]를 이용해 조리하였는데, 범방, 장항, 노래섬, 남북동 유적 등에서 출토된 집석유구는 대표적인 조리 시설이다. 오산리와 암사동 유적에서 출토된 시루형토기로 보아 특정 음식물은 쪄서 먹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의생활과 관련한 직접적인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아 당시 사람들이 어떠한 옷을 입고 생활을 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간접적인 고고학 자료를 통해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주거지와 패총 유적에서 출토되는 방추차 [가락바퀴]와 뼈바늘, 바늘통, 실, 송곳, 뼈칼 등은 대표적인 의생활과 관련한 일상도구이다.
실을 짜는 방추차와 뼈바늘은 의복 등을 제작했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자료이다. 동삼동 패총 즐문토기의 표면에 찍힌 그물 흔적과 궁산 유적에서 베실이 바늘귀에 끼워진 채 출토된 뼈바늘은 신석기인이 식물성 섬유를 실로 사용하여 바느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뼈바늘은 상노대도, 동삼동, 궁산, 구평리, 서포항 유적 등에 출토되는데, 크기는 보통 6~10㎝ 정도로 현재 사용하는 것과 크게 차이가 없다. 의복의 재질이나 형태 등은 실물 자료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일본 조몬[繩文]시대 토우에 표현된 옷과 직물 흔, 세계 각지의 민족지 자료로 볼 때 직포와 나무껍질 또는 동물 가죽을 재단하여 실로 꿰매 만든 의복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는 신체 장식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고, 사회 · 문화적 가치와 미의식이 결부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장신구가 사용된다. 그런 의미에서 신석기시대는 한국 장신구 문화의 조형을 이루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신석기인은 생업 활동을 통해 획득한 조개, 동물 뼈 등의 재료를 가공하거나 타 지역으로부터 입수한 옥석을 가공하여 의복이나 신체에 장식하였다. 장식 모습은 분묘나 주거지, 패총에서 출토되는 장신구의 형태를 통해 추정할 수 있으며, 종류는 귀걸이를 비롯하여 목걸이[수식], 팔찌, 발찌, 뒤꽂이 등이 있다.
귀걸이는 착용 방식에 따라 고리형의 결상이식(玦狀耳飾)과 삽입형의 이전(耳栓)으로 구분된다. 결상이식은 옥석으로, 이전은 토제로 만들었다. 이들 귀걸이는 동삼동, 선진리, 안도, 문암리, 신암리 유적 등에서 출토되고 있다.
수식은 동물의 이빨, 뼈, 발톱, 조개, 옥석 등을 가공하여 목이나 가슴을 장식하는 것인데, 재질에 따라 골제 수식, 옥석제 수식, 패제 수식 등으로 구분된다.
팔찌는 대부분 투박조개나 피조개에 구멍을 뚫어 제작하는데, 가덕도 장항 유적, 산등 패총, 안도 패총에서 발굴된 시신[인골]의 착용 예로 보아 수개씩 팔목에 끼어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조개팔찌는 남해안 지역의 어로민이 주로 착용하였으며, 일부 조개팔찌는 교역을 통해 서해안과 내륙 지역으로 유통되었다.
연대도 패총에서 출토된 돌고래와 수달, 너구리의 이빨을 이용한 발찌는 신석기인이 발목에도 장식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신석기 사회의 장신구 중 옥제 장신구나 조개팔찌는 분묘의 출토 양상과 재료의 희소성으로 보아 특정한 신분이나 역할을 담당한 소수 사람이 착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 장신구는 미적 아름다움을 표현하거나 신체를 보호하려는 벽사적인 기능도 가졌을 것이다.
인류가 처음으로 죽음을 인식하고 이에 대응하여 의도적으로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이라는 시설[구조물]을 만든 시기는 10만 년 전인 중기 구석기시대까지 올라간다. 그러나 죽음을 객관화하여 사자와 집단 공동체 간의 관계를 확인시키고, 죽음이 사회적으로 중요한 의미와 성격을 갖게 되는 것은 신석기시대부터이다.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분묘는 청동기시대의 무덤보다 구조도 단순하고 종류도 다양하지 않다. 현재까지 발굴된 분묘는 대략 100기 정도이다. 분묘 종류는 무덤의 구조, 매장 방법과 장소 등에 따라 토광묘, 옹관묘, 집단묘, 동굴묘 등으로 구분되며, 양적으로 토광묘가 가장 많다.
토광묘는 조기부터 후 · 말기까지 지속해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무덤 형식이며, 구조는 타원형 내지 장방형의 수혈을 파고 내부에 시신을 안치하는 단순한 형태이다. 일부 토광묘에는 시신을 안치하기 위해 토기편이나 돌로써 시상(屍床)이 마련되며, 돌과 토기를 이용해 시신을 덮기도 한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고성 문암리, 가덕도 장항, 부산 범방, 통영 연대도 · 욕지도, 여수 안도, 울산 처용리 유적 등이 있다. 최근 48기의 무덤이 발굴된 부산 가덕도 장항 유적은 한반도에서 발견된 분묘 유적 중 규모가 가장 크다.
옹관묘는 신석기 초기부터 나타나 중기까지 확인되나 그 이후에는 보이지 않는다. 서기전 5000년 무렵에 조성된 동삼동 패총의 최하층 옹관묘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특히 화장된 인골 편이 출토된 상촌리 유적의 옹관묘는 신석기시대에 화장 풍습이 존재했음을 알려 준다.
교동 유적의 동굴묘는 당초 주거용으로 사용되었던 동굴을 어떤 사유로 폐기하고 무덤 공간으로 전용한 사례이다. 내부에는 신전장으로 안치된 3구의 인골이 발을 중앙에 모으고 T자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부장품으로는 인골 주변에서 토기, 석부, 석촉, 결합식조침, 관옥 등이 출토되었다.
후포리 유적의 집단묘는 화강암괴로 둘려진 동서 4.5m, 남북 3.5m의 부정형 자연 구덩이를 이용하여 40여 구의 시신을 세골장으로 매장한 무덤이다. 하나의 분묘 시설에 수십 구의 시신이 시차를 두고 집단 매장한 무덤은 한반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것이다.
무덤 내부와 그 주변에서는 180여 점의 마제석부와 옥제 수식 등이 부장품으로 출토되었다. 시기는 신석기 조기로 추정된다.
매장법은 시신을 토중에 안치는 매장이 일반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상촌리 옹관묘나 후포리 집단묘 유적의 사례와 같이 2차장인 화장과 세골장도 일부 지역에서는 행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매장 방식, 즉 매장 자세는 신전장, 부신장(俯身葬), 굴장(堀葬), 측와장(側臥葬) 등으로 구분되며, 대체로 신전장이 주류를 이룬다. 연대도와 안도 유적에서는 2~3인이 동시 매장된 합장도 확인된다.
부장품은 청동기시대보다 소박하고 양적으로도 매우 적은 편이며, 없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양과 질, 규모에서 무덤 간에 차별성을 보인다. 부장품으로는 생업 활동의 도구인 작살 조침, 석촉, 석부, 토기 등과 피장자의 신분이나 사회적 위상을 알 수 있는 옥제 귀걸이, 수식, 조개팔찌 등의 장신구류가 주로 매납된다.
자연의 변화에 좌우되는 환경 속에서 삶을 살아온 신석기인은 사고방식과 생활 자체가 종교적이고 의례적인 측면이 강하였다. 신석기인의 정신세계와 사유 흔적을 보여 주는 각종 의례, 주술, 신앙 행위의 구체적인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각종 의례구를 통해 어느 정도 행위를 짐작할 수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인간과 동물의 형상을 축소하여 조형적으로 표현한 토우(土偶), 골우(骨偶), 석우(石偶) 등의 우상과 조개가면이 있다. 토우와 골우, 석우는 특정한 물상을 형상화한 것으로 동삼동, 세죽, 죽변, 오산리C지구, 욕지도, 농포동 유적에서 출토된 곰, 멧돼지, 물개, 개 모양 토우와 서포항 유적에서 출토된 사슴, 멧돼지 뼈를 가공하여 만든 골우가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 오산리와 동삼동, 죽변 유적에서 출토된 곰모양 토우는 신석기인의 곰에 대한 인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들 유물을 호신구 혹은 신상(神像) 등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토우의 형태적 특징과 출토 상태 등으로 보아 토테미즘적 사고관을 반영한 주술구 혹은 어로 행위와 관련한 의례에 사용된 기물(器物)로 추정된다.
이 밖에 신암리, 봉길리 유적과 욕지도, 범방, 율리, 수가리, 여서도 패총에서도 각종 인물상 토우와 남녀 성기를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 토제품이 출토된다. 인물형 토우는 그 성격이 자세하지 않으나 원시신앙이나 의례와 관련 도구로 추정된다.
경주 봉길리, 부산 율리, 범방 패총에서 출토한 남녀 성기를 표현한 토제품은 풍요와 다산을 기원한 주술 혹은 의례용 기물로 추정된다. 동삼동과 비봉리 유적에서 출토된 토기 중에 사슴과 멧돼지 형상을 선각으로 새긴 토기는 수렵 의례에 사용된 특수 용기로 보인다.
조개가면은 동삼동 패총에 출토된 것이 유일하며, 국자가리비에 눈과 입을 형상화한 구멍을 뚫은 형태이다. 성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있지만, 조개가 갖는 다양한 상징성으로 보아 집단의 공동 의례[의식]나 축제 혹은 벽사적 행위와 관련한 도구로 추정된다.
의례구 외에 신석기시대의 원시 신앙 내지 의례 행위의 구체적인 실상을 잘 보여 주는 것이 울산 반구대 암각화 유적이다. 유적의 조성 시기와 성격에 대해 일부 다른 의견도 있지만, 다양한 동물상과 물상이 의미하는 전체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신석기시대 생업 의례가 이루어졌던 신성한 공간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 쉽지 않으나, 특정 동식물을 숭배하는 토테미즘이나 산과 바다, 나무, 돌 등 우주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신앙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 교류 형태는 문물 이동의 지리적 범위와 성격에 따라 한반도 이외의 타 문화권과 접촉에서 이루어지는 대외교류와 지역사회의 공동체 간에 이루어지는 대내 교류로 나눌 수 있다.
지역 공동체 간에 이루어진 대내 교류는 해안 지역의 패총 유적에서 출토되는 다양한 외래계 유물로 보아 지역 간 교류 활동과 문물의 이동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례는 현지에서 산출되지 않는 소재로 만든 장항, 범방, 연대도 유적 등의 편마암제 마제석부와 옥제 장신구 등을 통해 알 수 있으며, 이들 문물은 지역 간 교류를 통해 내륙에서 남해안 지역으로 유입된 것이다.
청도 오진리 유적, 단양 상시 유적, 정선 매둔동굴, 제천 점말동굴, 군산 노래섬, 보령 송학리 유적에서 출토된 투박조개 팔찌와 홍합, 백합, 전복, 대합 등은 해안 지역의 문물이 내륙 지역의 원거리까지 유통되고 교역되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교류 활동은 생업 정보와 함께 지역 간에 형성된 다양한 교류[교역]망을 통해 전개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밖에 남해안과 제주도 간의 교류도 양 지역에서 출토되는 유물을 통해 볼 때 내륙 지역 못지않게 활발히 진행되었다.
대외교류 활동은 주로 동남해안 지역과 일본 규슈[九州] 지역의 신석기인 간에 전개되었다. 물론 중국 동북 지역과 연해주 지역의 문화권과의 교류도 예상되지만, 구체적인 자료는 빈약한 편이다. 이에 반해 한반도 신석기인[즐문토기인]과 일본 규슈 지역의 조몬인[繩文人]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오랜 기간 교류 활동을 전개해 왔다. 이러한 교류는 신석기 전 기간을 통해 한일 양 지역의 생업 정보와 문물이 상호 이동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교류 흔적은 동삼동 패총을 비롯한 신암리, 범방, 상노대도, 연대도, 욕지도, 안도 유적 등 동남해안 지역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되는 일본 조몬토기, 흑요석 및 사누카이트제 석기 등의 각종 유물에서 찾아지며, 같은 양상으로 일본 규슈 니시카라쯔[西唐津] 해안 유적, 대마도 사가(佐賀) 패총, 고시다카[越高] 유적 등에서 한국계 즐문토기와 조개팔찌, 어로구 등이 출토된다.
특히 이 중에서도 여러 종류의 조몬[繩文]문화 문물이 다량 출토되고 있는 동남해안과 규슈 지역 간의 해양 교류는 공통적인 생업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어로 활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접촉하는 가운데 형성되었으며, 그 결과 상호 물자 유통이라는 원시적인 교류[교역] 시스템이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교류 실태를 구체적으로 보여 주는 사례가 규슈 지역의 흑요석과 동삼동 패총 집단이 생산한 조개팔찌의 교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