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원량(元亮), 호는 영천자(靈川子) 또는 아차산인(峨嵯山人). 숙주(叔舟)의 증손자이며, 종호(從護)의 아들이다.
1519년(중종 14)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하였으나, 같은해에 기묘사화로 인하여 파방되었다. 1521년 신사무옥 때 안처겸(安處謙)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갔다가 양주(楊州)로 이배되었으며, 뒤에 풀려났다.
그 뒤 20여년간 아차산 아래에 은거하며 서화에만 몰두하다가, 인종 때에 다시 복직되어 태인과 간성의 목사를 역임하고 상주목사로 재임중 죽었다.
『병진정사록』에 의하면 문장에 능하고 서화를 잘하여 삼절(三絶)로 일컬어졌다고 하였으며,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특히 묵죽(墨竹)에 뛰어났다고 하였다. 그리고 『연려실기술』에는 묵죽과 더불어 포도그림도 잘 그렸다고 하였다.
현재 그의 진작(眞作)으로 단정지을 수 있는 작품은 남아 있지 않으나, 국립중앙박물관의 「심매도(尋梅圖)」와 「화조도」가 그의 작품으로 전칭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