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언지(彦之), 호는 둔암(鈍庵). 관찰사 심선(沈璿)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병마절도사 심안인(沈安仁)이고, 아버지는 안성군수 심빈(沈濱)이다. 어머니는 대사성 서강(徐岡)의 딸이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불우하게 지냈으나, 학업에 열중하여 경전을 능히 통달했고 서책을 두루 읽어 우리나라 및 중국의 법률에 정통하였다. 1519년(중종 14) 생원시와 진사시에 연이어 합격하고 1525년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특별히 제수되었다. 그 뒤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청요직을 역임하였다.
1537년 파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감사의 추천으로 이듬해 사복시정에 승진되었다. 그러나 시기하는 사람들의 탄핵으로 다시 외직으로 밀려나 부평부사에 부임, 민폐를 제거하고 진휼에 힘썼다. 그 뒤 대사간에 발탁되어 시무책을 제시했고, 1543년 예조참판이 되었으며 이어서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인종이 즉위하자 전라도관찰사에 제수되어 지방수령의 탐학을 감독하고 민간에 효행과 절의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47년(명종 2) 이조참의, 1550년 이조참판, 1553년 한성부판윤에 올랐다. 이어서 형조판서·공조판서·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558년 지중추부사의 한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곧 형조판서에 발탁되었으며 1561년 우참찬이 되어서는 과거제 운영의 정상화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품이 검소하고 엄격하여 직무에 매우 공정하였다. 권세와 재물을 즐기지 않았고, 직언을 잘하였다. 특히, 법률에 밝아 형정을 오랫동안 주관하며 송사를 바르게 처리하였다. 시호는 호안(胡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