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삼척(三陟). 자는 사형(士烱), 호는 어촌(漁村). 사정(司正) 심충보(沈忠甫)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 병조판서 심문계(沈文桂)이고, 아버지는 예조좌랑 심준(沈濬)이다. 어머니는 사직 김보연(金普淵)의 딸이다. 찬성 심언경(沈彦慶)의 동생이다.
1507년(중종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513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에 보임되었다. 그 뒤 호당(湖堂: 독서당의 다른 이름으로 임금의 특명으로 독서를 하던 곳)에 들어가 사가독서하면서 문명을 날려, 지평(持平)·정언(正言)·장령(掌令)·홍문관교리·집의(執義) 등의 청요직을 두루 지냈다.
언관을 역임하면서 국방문제의 중요성을 제기하였고, 국가기강의 확립을 위하여 심정(沈貞)을 비롯한 권간들의 횡포를 탄핵하였다. 1530년 대사간이 되어서는 형 심언경과 함께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적극 주장, 실현시켰다. 그러나 김안로가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면서 붕당을 조직하고 대옥(大獄)을 일으켜 사림들을 모함하자, 비로소 지난 날 자신의 추천행위를 후회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김안로가 자신의 외손녀를 동궁비로 삼으려 하자 이를 질책하였고, 이를 계기로 두 사람 사이에 틈이 생겼다. 1536년 이조판서가 되고, 이어서 공조판서를 역임하면서 김안로의 비행을 비판하자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곧 김안로와 그 일당이 축출되자, 우참찬에 올랐다. 인종이 즉위하여 대윤(大尹)일파가 집권하면서 향배가 바르지 않다고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 뒤 복관되었으며, 시·서·화에 능하였다. 시호는 문공(文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