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는 전국에 13조창을 설치하고 조운(漕運)을 통하여 각 지방의 세곡(稅穀)을 개경으로 운반하였다. 영풍창(永豊倉)은 양광도(楊廣道, 충청도) 부성(현 서산), 홍주(현 홍성) 및 그 주변 지역의 세곡(稅穀)을 모아 개경의 경창(京倉)으로 운송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영풍창은 고려 초기에 설치한 전국 12조창 중 하나로, 현 충청남도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지역에 위치하였다. 992년(성종 11) 전국의 60개 포구에서 개경까지의 수경가(輸京價, 조운선의 운반 비용)를 정할 때에, 다른 조창들과는 달리 영풍창이 있던 포구는 포함되지 않아 그 이후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영풍창의 수세(收稅) 구역은 양광도 홍주(洪州, 현 충남 홍성군)와 부성(富城, 현 충남 서산시), 그리고 그 속군현(屬郡縣) 지역이 중심이 되었다.
영풍창 지역은 고려시대 이래 수 차례에 걸쳐 굴착이 시도되었던 굴포운하의 북쪽 어귀에 해당한다. 굴포운하의 개착은 해난사고가 빈번히 발생하였던 태안반도 앞바다의 안흥량(安興梁)을 피해나가기 위해서였다. 1134년(인종 12) 최초의 시도 이래, 1154년(의종 8), 1391년(공양왕 3), 1412년(조선 태종 12) 등 몇 차례 공사를 진행하였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했고, 1461년(세조 7)에도 운하를 뚫고자 하는 검토가 있었다. 하지만 조수 간만의 차이가 심하고 암반이 단단하여 끝내 운하의 굴착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풍창의 위치가 태안반도 북쪽 가로림만 깊숙한 곳에 위치한 점 역시 현재의 홍성이나 서산 등지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는 데에 있어서 안흥량의 험난함을 피하도록 하는 것에 중요한 목적이 있었다. 영풍창이 위치한 곳은 어은천이라는 작은 하천이 가로림만으로 흘러들어가는 지점이었다. 현재는 솔감저수지가 조성되어 있고 주변이 농경지로 개간되어 있어 조창의 흔적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창개 혹은 창포라는 옛 지명이 남아 있는 등 영풍창의 흔적이 구전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근래까지도 옛 창고와 관련된 유물들이 주변 일대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고려사』에는 정종(靖宗) 때(10341046) 전국 각 조창에 배치할 조운선의 숫자를 정하면서, 영풍창에는 1척 당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는 초마선(哨馬船) 6척을 두었다고 한다. 영풍창에 모인 세곡은 서해안을 따라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되었다. 영풍창을 비롯한 13조창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조창을 드나드는 세곡의 보관 및 운송과 관련된 실무를 담당했을 것이며, 13조창에는 판관(判官)이 임명되어 각 조창에서의 세곡 운송과 보관을 관리, 감독하였다. 인종 때(11221146) 개정된 외관(外官)의 녹봉 규정에 따르면, 13창의 판관에게는 20석의 녹봉이 지급되었다.
영풍창의 변천과 폐쇄에 대한 내용에 대해서는 분명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선시대에는 영풍창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영풍창의 폐지 시점은 고려 말기나 그 이전이 될 것이다. 그와 관련하여, 1391년 굴포운하 굴착에 대한 사료에서 영풍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을 주요 근거로 영풍창은 14세기 말보다 상당히 이른 시기에 폐쇄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는 물론 1914년 일제의 지방 행정구역 개편 때까지도 이 지역에 영풍창면(永豊倉面)이라는 면 명칭이 존재했음을 감안하면, 영풍창은 고려 말기까지 그대로 존속했을 가능성도 높다. 그에 따른다면, 고려 말기 왜구의 침략이 극심해지면서 영풍창이 폐쇄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태안반도 북쪽의 가로림만 안쪽에 위치했던 영풍창은 고려시대 전국에 설치된 13조창 중 하나로서, 양광도의 홍주와 부성, 그리고 그 주변 지역의 세곡을 모아 개경의 경창으로 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풍창은 조선시대 조창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으나 영풍창 인근에 영신창, 안민창 등이 설치되어 일시적으로 운영되기도 하였다. 영풍창은 고려시대 태안반도 지역의 유일한 조창으로서 충청도 서부 지역에서 산출되었던 세곡의 경창 운송에 주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