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금잠은 검은 금비녀로, 이것을 신체로 삼아 두랑당에 모셔두고 4월 초순에 작은 제사를 시작으로 단오 때 큰 제(祭)를 올린다. 이렇게 오금잠을 신체로 삼아 제를 올리는 까닭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동국여지승람』에 오금잠을 고려 태조 때 물건이라고 한 기록과 달리 『성암유사』에는 신라시대의 유물이라고 하고 있고, 『목민심서』에도 안동의 오금잠제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라공주 오금잠신이 있어 부민(府民)들이 깊이 신봉한다고 한 것으로 보아 오금잠신은 여신적 성격을 지닌 존재이고 검은 금비녀가 신라공주의 신체를 상징하는 것일 가능성은 있다.
오금잠신은 안동에서도 섬겼다고 하나, 삼척지방의 파생으로 보여지고 오늘날에는 행하여지지 않는다. 예전의 이에 대한 기록은 『동국여지승람』·『남명선생별집(南冥先生別集)』·『미수기언(眉叟記言)』·『번암집(樊巖集)』·『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 등에 전한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풍속조(風俗條)에 보면 치제(致祭)방식에 대한 기록이 있다.
삼척부에서는 부민들이 오금잠을 작은 함에 담아 치소(治所)인 부관청(府官廳) 동쪽 나무 아래 묻었다가 단오가 되면 이민들이 그 오금잠을 파내어 놓고 제사한 다음 이튿날 다시 묻었다. 오금잠은 고려 태조 때의 물건이라 하나, 그것에 제사를 드리게 된 연유는 밝혀져 있지 않다.
또 『남명선생별집』 「김성암유사(金省庵遺事)」에 의하면, 김효원(金孝元)이 삼척에 부임하여 치안과 혁폐(革弊)를 급선무로 삼았다. 그 읍에 금비녀[金釵]가 한 개 있었는데, 신라시대 유물이라고 하여 100여 겹을 정성스럽게 싸서 성황(城隍)에 두고 주민들이 신봉하였다. 또한, 마을의 대소사를 먼저 성황에 알린 다음 행하였다.
김효원은 몸소 금비녀를 없애기로 작심하고, 제물을 차려놓고 음사(淫祠)를 혁파하였다. 여기에 의하면 오금잠은 신라시대 유물로 되어 있다. 성황에 금채를 따로 모셨다고 해서 『동국여지승람』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또한, 허목(許穆)의 『미수기언』에 의하면, 오금잠의 유래를 알 수 없고 해마다 5월 5일이 되면 무당들을 모아 3일 동안 큰 제사를 행하는데, 이것은 그 고을 호장(戶長)이 주관하여 치른다.
제사를 행하기 전에는 나그네도 재우지 않고 사람이 죽어도 곡을 하지 않는다. 이에 낭비가 심하여 부사인 정언황(丁彦璜)이 그 사(祠)를 폐하고 오금잠을 석실에 폐장시켰다.
『미수기언』의 기록은 오금잠제의 규모와 금기를 밝혀놓은 것이라 하겠다. 채제공(蔡濟恭)의 『번암집』에도 「오금잠가(烏金簪歌)」라는 것이 있어서 단오에 행해지는 오금잠제의 질탕한 놀이를 짐작하게 한다.
한편 오금잠제는 이렇게 김효원에 의해 금지되지만 오금잠신의 성격이 지역민들에 의해 태백산신령인 백두옹(白頭翁)의 모습으로 변모되어 길흉화복을 관장하는 절대적 존재로 지속적으로 숭배되는 양상을 찾아볼 수 있다.
오금잠제는 비녀를 신체로 섬기는 독특한 제의이고, 그 행사기일은 단오로 되어 있어서 단오제로도 감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유래를 확인할 수는 없어도 신체가 비녀로 설정된 점, 단오제와 결부된 점 등은 삼척지방의 동제를 이해하는 데에 긴요한 자료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