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복(同福). 본명은 점수(占壽). 전라남도 화순 출생. 부유한 지주 집안 출신으로 전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가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였다. 1924년에 졸업하고 일본의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유학하여 1931년에 졸업하였다.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서울에서 한때 김주경(金周經) 등과 서양화 단체 ‘녹향회(綠鄕會)’ 동인이 되어 사실적 자연주의 수법의 유화를 발표하였다.
1935년 무렵부터는 김주경과 함께 프랑스 인상파 화풍의 신선하고 밝은 색채로 한국의 자연미와 풍정미 표현에 열중하였다. 그와 아울러 색채미와 빛의 표현을 본질로 한 순수 회화론을 주창하기도 하였다.
1938년에 자비로 출판한 『오지호 · 김주경 2인화집』은 한국 서양화사의 인상파 존재를 확고히 한 것이었다. 8 · 15 광복 후 1948년부터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 미술과 창설에 참여하여 1960년까지 교수로 재직하였다. 호남 지역 서양화계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중년기 이후의 작품 활동에서는 인상주의 미학을 소화한, 독자적인 생동적 필치와 풍부한 색채의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말년에는 1978년과 1980년 유럽 여행에서의 감흥을 분출시킨 분방한 필치의 작품도 많이 남겼다.
1960년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 작가 · 초대 작가 및 심사 위원을 역임하였고, 1976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작품 활동 이외에 자신의 예술 이념과 사상을 이론적으로 발언한 「구상회화 선언」(1959) 등의 논문을 발표하기도 하였고, 1968년에는 논문집 『현대회화의 근본문제』를 출판하였다. 1978년에는 전남매일신문사에서 『오지호작품집』을 간행하였다.
1982년에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사망한 뒤 미망인이 유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다. 대표작으로는 「누드」(1928년), 「시골소녀」(1929년), 「자화상」(1931년), 「아내의 상」(1937년), 「사과밭」(1937년), 「추광(秋光)」(1960년), 「항구」(1980년) 등이 있다.
1973년 제8회 대한민국문화훈장 모란장, 1977년 제22회 대한민국예술원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에는 문화훈장 금관장이 추서되었다.
1985년 10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오지호 회고전이 열렸고, 1988년 4월광주의 남봉미술관에서 회고전이 개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