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경은 해방 이후 북한에서 「만경대」·「묘향산」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1928년 일본 도쿄미술학교 도화 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초기에는 서정적 사실주의 경향의 작품을 그렸다. 1935년 무렵부터는 프랑스 인상주의 미학을 수용한 작품세계를 펼쳤다.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을, 1946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의 위원장을 지냈다.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 교장이 되었다. 월북 이후 「김일성장군 전적」(1947),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작품과 「묘향산」(1955) 등의 순수 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충청북도 진천 출생. 1925년 경성 제일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도쿄로 유학하여 1928년 도쿄미술학교(東京美術學校) 도화사범과를 졸업하였다. 프랑스 인상주의 미학(美學)을 수용한 작품세계를 주도하였으며 비평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경성제일고보 시절인 1923년 고려미술원에서 이제창의 지도로 오지호, 김용준 등과 함께 그림수업을 받았으며, 1923년과 1924년 고려미술원 전람회에 참여하였다.
1927년부터 1929년에는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 출품하여 연속으로 3회 특선을 하였으나 선전이 일제의 어용전람회라고 생각한 뒤로는 참여하지 않았다.
1928년 서울에서 박광진(朴廣鎭), 심영섭(沈英燮), 장석표(張錫豹)와 함께 양화운동 그룹인 녹향회(綠鄕會)를 조직하였고, 1929년 5월 24일 천도교 기념관에서 녹향회 창립전을 개최하였다.
이듬해 오지호(吳之湖)가 가담한 2회전에는 민중회화를 출품하였고, 이때부터 녹향회를 민중적․계몽적․민족적 성격으로 전개시켜 나아갔다. 1932년 3회전을 계획하였으나 일제의 간섭으로 좌절되었다.
1938년 10월 23일 오지호와 김주경 두사람의 작품 각 10점, 그리고 오지호의 「순수회화론」과 김주경의 「미와 예술」이라는 논문이 실린 『오지호 · 김주경 이인화집』을 발간하였다. 자비로 발간한 이 화집은 한국 최초의 원색 호화판 화집이다.
김주경의 초기 작품 경향은 서정적 사실주의다. 그러나 1935년 무렵부터는 오지호와 더불어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화법의 신선하고 밝은 색채 및 빛의 미학에 심취한 화면 작업을 지향하였다. 이는 한국 서양화사에서 인상파가 확고히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김주경과 오지호는 한국의 맑은 공기와 명랑한 자연미를 선려(鮮麗)하고 투명한 색채 감각으로 표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오지호 · 김주경 이인화집』에 실린 김주경 작품들은 현재 전하지 않으며 비슷한 시기의 다른 인상주의 작품인 「화분」이 전해지고 있다.
광복 직후인 1945년 조직된 조선미술건설본부의 서양화부 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이듬해 2월 23일에는 조선미술가동맹을 결성하여 위원장을 지냈고 1949년부터 10년간 위원을 역임했다.
1947년 월북하여 평양미술학교 창설에 참여, 초대 교장이 되었고, 1949년 평양미술학교가 대학으로 승격하면서 1958년까지 초대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학장직에서 물러난 뒤에는 강원도 평강국영농장에서 농민들과 생활하며 현역미술가로 활동하였다.
북한에서 창작한 작품으로는 월북 직후의 「김일성장군 전적」(1947년), 「만경대」(1960년대) 등의 정치적 작품 외에 「묘향산」(1955년) 같은 순수 풍경화가 알려져 있다.
1947년 제1회 국가미술전람회(문학예술축전 미술전람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