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릉군 ()

경상북도 울릉군 법정구역도
경상북도 울릉군 법정구역도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경상북도 동북단 동해상에 위치한 군.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경상북도 동북단 동해상에 위치한 군.
개관

사면이 동해로 둘러싸여 있다. 동경 130°47′37”∼130°55′20”, 북위 37°14’14”∼37°33’01”에 위치한다. 면적은 72.86㎢이고, 인구는 1만 153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1개 읍, 2개 면, 25개 행정리(10개 법정리)가 있다. 군청은 경상북도 울릉군 울릉읍 도동리에 있다.

자연환경

주도(主島)인 울릉도(鬱陵島), 부속도인 관음도(觀音島) · 죽도(竹島) · 독도(獨島) 및 여러 개의 암도(岩島)로 이뤄져 있다.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있었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종상화산(鐘狀火山)의 정상부로, 조면암(粗面岩) · 안산암(安山岩) · 현무암(玄武岩)으로 구성되어 있다.

백두화산맥이 남동쪽으로 길게 뻗어 동해상에 울릉도를 솟게 하고, 그 여세를 몰아 동남해상에 독도를 비롯한 많은 화산을 분출시켰다. 울릉도 중앙부에는 주봉인 성인봉(聖人峰, 984m)이 솟아 있고, 그 서쪽으로는 미륵산(彌勒山, 901m) · 초봉(草峰, 608m) · 형제봉(兄弟峰, 712m) · 향목령(香木嶺, 297m), 동쪽으로는 관모봉(冠帽峰, 586m) · 망향봉(317m) 등이 잇따라 있어 지붕을 이룬다.

성인봉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가두봉(可頭峰, 194m), 동북으로 두루봉에 이르는 능선이 사방으로 뻗어 있고, 산맥 사이에는 깊은 침식곡이 발달하여 자연적인 행정 경계를 이룬다. 섬의 북서부 사면에 있는 나리분지(羅里盆地)는 동남부 · 서남부가 높이 500m 안팎의 단애에 둘러싸이고 북부가 200m 이하의 낮은 산지로 막혀 있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이다.

이 분지는 성인봉의 칼데라 화구(caldera火口)가 삼각형 모양으로 함몰해 형성된 것이다. 그 화구에는 2차로 분출된 화산이 중앙화구인 알봉(卵峰, 538m)을 만들어 결과적으로 이중화산을 형성하였다. 그러므로 성인봉을 비롯한 동남부와 서남부의 높은 단애들은 이 화산의 외륜산(外輪山)에 해당한다.

이 군의 근해는 동한난류(東韓暖流)와 한류가 교차하는 조경수역(潮境水域)이므로 회유성 어족이 모여들어 좋은 어장을 이룬다. 그러나 길이 56.5㎞의 해안선은 대부분 단조롭고 높은 절벽을 이루며, 특히 서남과 동남 해안은 90m 높이의 절벽으로 천연의 양항 발달이 어렵다.

한편, 독도는 국토 최동단에 위치한 외딴 섬이다. 울릉도에서 동남쪽으로 92㎞ 떨어진 독도는 동도(東島)와 서도(西島)를 중심으로 가재바위 · 구멍바위 · 지네바위 등 34개의 돌섬과 암초들로 구성되어 있다. 동도에는 화산 분화구가 있고 절벽이 솟아 있어 배를 대기가 어렵다. 이 곳에는 독도를 지키는 경비대가 있다. 맞은편의 서도에는 남근석과 구멍바위, 그리고 독도기념비가 있다. 이 군은 작은 바위섬에 불과하나 군사, 해양자원 관리, 해양 운항 등 다방면에서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해상에는 동한난류가 연중 흘러 온난다습한 해양성 기후가 뚜렷하다. 평균기온 13.1℃정보이며, 1월 평균기온 1.6℃, 8월 평균기온 22.5℃ 내외이다. 연강수량은 1,846㎜ 정도이다.

특히, 겨울에는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연강수량의 40%를 눈이 차지한다. 평균적설량은 100㎝ 안팎이며 최심적설량은 200㎝가 넘고 나리분지는 300㎝에 이르는 다설(多雪)지역이다. 바람이 많이 불어 한 해에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은 70일 정도이다. 평균풍속 초속 3.6m, 폭풍일수 15일, 강설일수 46일, 쾌청일수는 49일이다.

역사

울릉에 대한 초기의 역사는 자료가 없어 잘 알 수 없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 옥저조에 기록된 기로(耆老)들의 이야기에서 약간의 사정을 알 수 있다. 곧 3세기경 함경남도 지방에 있던 옥저국 사람들이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러 갔다가 표류하여 수십일 만에 이 섬에 닿았다고 한다.

그들에 의하면 이 섬에 사람이 살고 있으나 언어는 알 수 없었고, 풍속으로는 7월에 동녀(童女)를 구하여 바다에 집어넣는 해신제(海神祭)를 지냈다고 한다. 그 뒤의 생활상은 알 수 없지만 일찍부터 소국(小國)을 형성하여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하고 있었던 것 같다.

512년(지증왕 13) 하슬라주(何瑟羅州) 군주(軍主)인 이사부(異斯夫)가 이곳 우산국(于山國)을 정벌하면서 우리의 역사권 안에 포함되었다. 이사부는 강인한 이 곳 사람들을 제압하기 위해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섬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우리나라 본토와 긴밀한 연결을 가지면서 발전해 왔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만들어진 고분이 현재 80여 기 남아 있다.

이사부의 정벌 이후 본국과 어떤 관계를 유지해 왔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930년(태조 13) 울릉도에서 백길(白吉) · 토두(土豆)를 파견해 방물(方物)을 바치자 태조는 백길을 정위(正位)로, 토두를 정조(正朝)로 삼았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이는 당시 각지에서 할거하던 호족들이 왕건에게 귀부하던 추세에서, 울릉도도 본국 내의 정세를 잘 알고 있었던 것을 말해 주는 동시에 본국과 울릉도가 긴밀히 연결된 것을 나타낸다.

후삼국 통일 이후 울진현에 소속되었다. 1018년(현종 9) 동여진(東女眞)의 침입을 받아 섬이 황폐해지자 이원구(李元龜)를 파견해 농기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1022년 다시 여진의 침입을 받아 거의 무인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1032년(덕종 1)에는 우릉성주(羽陵城主)가 토산물을 바쳤다고 한다. 그 뒤 섬을 개척하려는 시도가 이뤄져 1141년(인종 19) 이양실(李陽實)이, 1157년(의종 11) 김유립(金柔立)이 파견되어 이 지역의 형편을 조사하였다.

고려 말 왜구 때문에 무인도가 되었으나, 조선 초 이래 육지의 백성들이 계속 건너가 살았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울진현에 소속되었지만, 이곳이 왜구의 거점이 된다 하여 조정에서는 쇄환정책(刷還政策)을 계속 시행하였다. 그렇지만 몰래 들어가 사는 백성들이 많았다.

1412년(태종 12) 강원도관찰사의 보고에 의하면 11호 60여 인이 거주하였고, 소 · 말과 논은 없지만 콩 · 보리를 경작하고 해산물과 과일이 많았다고 한다. 그 뒤에도 잠입이 계속 이뤄지자 수시로 안무사(安撫使) · 경차관(敬差官)이 파견되어 주민을 쇄환하였다.

세종 · 성종 때는 신지(新地) · 신도(新島) 찾기운동이 전개되어, 그 때마다 울릉도가 거론되었다. 그러나 너무 멀리 떨어진 바다 가운데 있어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구의 침입이 염려된다고 하여 끝내 쇄환정책이 유지되었다.

1471년(성종 2)에는 삼봉도(三峰島: 독도)를 조사하기 위해 박종원(朴宗元)이 파견되었다. 1614년(광해군 6) 일본이 울릉도를 의죽도(礒竹島)라 하여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다음 해에 이를 조사하려 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강력히 이의를 제기하였고 양국 간에 분규가 일어났다.

그 뒤 1693년(숙종 19)과 1694년에 일본이 울릉도를 죽도(竹島)라고 하면서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696년 울산 어부 안용복(安龍福) 등이 활약하여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영유권 주장이 종식되었다. 그 뒤에도 동해안 영장(營將)이 정기 순시하여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후 해양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리고 울릉도와 독도를 제멋대로 죽도와 송도(松島)라고 부르며 자주 밀항하여 산림을 벌채하였다. 조정에서는 1881년(고종 18)과 1882년에 이를 강경하게 항의하는 한편, 1884년 개척령을 공포하여 울릉도 이민을 장려하고 관선도장제(官選島長制)를 실시하였다.

1900년에는 이 곳을 울도(鬱島)로 개칭하고 강원도에 소속시켜 군수를 임명하였다. 1906년에는 경상북도에 편입시키고 남면 · 서면 · 북면으로 개편하였다. 한편, 일본은 1905년 독도를 마음대로 그들의 시마네현(島根縣)에 소속시키고 해군의 보급기지로 사용하여 독도분쟁을 일으켰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경상남도에서 경상북도로 이속되었다.

1949년 지방자치제가 시행됨에 따라 울릉군으로 개칭되었다. 1963년 서면 태하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9년 5월 1일 남면이 울릉읍으로 개칭 · 승격되어, 현재의 1읍 2면 체제를 구축하였으며, 2000년 독도리가 신설되었다.

유물 · 유적

동해에 외따로 떨어진 섬으로 자연 · 지리적인 환경 때문에 이렇다 할 고대 유적이나 유물은 거의 없다. 1957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조사를 실시해, 삼국시대의 고분이 북면 현포리(38기) · 천부리, 서면 남서리(37기) · 남양리 · 태하리 등지에 분포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신라토기를 출토한 바 있다.

이 가운데 서면의 울릉 남서동 고분군(경상북도 기념물, 1986년 지정)과 북면의 울릉 현포동 고분군(경상북도 기념물, 1986년 지정)은 국가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명승과 경관으로는 성인봉 · 봉래폭포 · 사자암(獅子巖) · 공암(孔巖, 일명 코끼리바위) · 삼선암(三仙巖) 등이 있다.

희귀종으로는 서면 남양리 통구미(通九味)의 향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태하리 대풍감(待風坎)의 향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와 태하동의 솔송나무 · 섬잣나무 및 너도밤나무군락(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이 있다.

그리고 울릉읍 도동의 섬개야광나무 · 섬댕강나무군락(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북면 나리의 울릉국화 · 섬백리향군락(천연기념물, 1962년 지정) 및 성인봉의 원시림(천연기념물, 1967년 지정), 울릉읍 사동의 흑비둘기 서식지(천연기념물, 1971년 지정), 도동리의 독도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등이 있다.

한편 북면의 울릉 나리동너와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84년 지정) · 울릉 나리동투막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84년 지정) · 울릉 나리동투막집(경상북도 민속자료, 1984년 지정) 등은 이 지방 특유의 가옥 형태를 보여준다.

교육 · 문화

1882년(고종 19) 울릉도가 개척되기 전까지는 피난민이나 표류민들이 일시적으로 거주할 뿐이었으므로 교육기관은 없었다. 학교로서의 면모를 갖춘 근대교육기관으로는 1908년 심능익(沈能益)이 관어학교를 설립하였으나 경비 부족으로 1909년 휴교하였다. 그 뒤 1913년에 울릉공립보통학교로 다시 개교하였다.

1910년 신명학교(新明學校)가, 1911년에는 울릉사립보통학교가 문을 열었다. 1946년 울릉중학교가 설립되었다. 1952년 홍순엽(洪淳曄)이 설립한 사립학술강습회 ‘울릉고등학원’이 1954년에 울릉수산고등학교로, 1970년에 울릉종합고등학교로 발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2015년 현재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4개교, 중학교 4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문화시설로는 복지회관과 울릉읍 저동리에 경상북도립 울릉공공도서관이, 도동리에는 울릉학생체육관과 국내유일의 영토박물관인 독도박물관이 있다. 문화행사로 우산문화원은 매년 10월 초에 우산문화제(于山文化祭)를 개최하고 있으며, 단오에는 민속그네뛰기 대회가 열리고 있다. 그밖에 태화성당신당제, 오징어 축제 및 낚시축제가 있다.

민속

이 고장의 특이한 놀이로 7월 하순에 벌이는 섬돌이놀이가 있다. 이것은 선주 또는 섬 주민이 가족 · 친척과 아는 사람, 선원들을 배에 태워 바다에 나가 하루를 즐기는 놀이이다. 이 날은 아침 일찍부터 배를 오색기로 장식하고 배에 오른 사람들을 후하게 대접한다. 순풍에 배를 띄워 춤 · 노래 · 술과 고기잡이도 하면서 바다에서 하루를 즐긴다.

산신제와 해신제가 있는데 마을에 따라 어느 하나만 지내거나 둘 다 지내기도 한다. 산신의 명칭은 다양하여 산왕신 · 산령신 · 산왕대왕지신 · 동신 · 본부산령신 · 구암동사신(龜巖洞社神) 등으로 불린다. 산신제는 정월 대보름에 거의 모든 마을에서 지낸다.

제관은 덕망 있고 부정이 없으며 그 해 운수에 맞는 사람으로 선정한다. 제물은 제관 집에서 과일 · 떡 · 해산물 등을 준비한다. 제주 · 제관 · 집사 3인이 주관하여 제당에서 자정에 제를 지내고, 다음 날 제관 집에서 지방 유지와 함께 음복한다. 여자의 참석은 금기로 되어 있다.

해신제의 신은 동해해신 · 동해보명신 · 사해용왕신 등으로 불리며, 제는 삼월 삼짇날 해신당에서 올린다. 제관은 어촌계원들이 여유 있고 모범적인 인물을 선정하며, 제가 끝난 뒤 1년 동안 근신해야 한다. 제물은 제주가 유고가 없는 상점에서 구입하는데, 돼지머리와 과일 · 떡 · 해물 일체를 차린다.

삼월 초이튿날 자정에 해신당에서 제주 · 제관 · 집사와 마을의 각 기관장이 제사를 지낸다. 축문을 낭송하고 12매의 소지를 태우며 무사태평과 풍어 등을 빈다. 다음 날 농어민이 모여 음복하고 농악과 춤으로 하루를 보낸다.

설화 · 민요

이 고장은 설화가 풍부한 지역이다. 지명마다 유래담이 있고 섬 특유의 민속신앙에 관한 전설이 있다. 또한 효자 · 열녀설화와 역사적 인물에 관한 설화 등이 전한다.

성인봉은 울릉도의 명산인데 가뭄이 들면 꼭대기를 파헤치는 관습이 있다. 옛날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한 울릉도에 석 달이나 가뭄이 계속된 적이 있었다. 이에 점을 쳐 보니 성인봉 꼭대기를 파면 비가 올 것이라 하였다.

마을사람들은 명산을 파헤치는 것이 내키지 않았지만, 도사(島司)의 독려로 삽질을 하였다. 얼마쯤 파니 묻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가 나와 개울로 굴려 버리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그 뒤 가뭄 때마다 성인봉을 파게 되었고 명당이라 알려진 이곳에 묻은 시신들을 파내었다고 한다.

태하리의 성하신당(聖霞神堂 : 서낭당)에서 받드는 신의 유래담은 울릉도의 대표적 전설이다. 조선 선조 때 강원도에서 섬에 들어온 순회사 일행이 태하리에서 유숙하며 도내를 순찰하였다. 순회사는 출항하기 전날 꿈에 동남동녀 두 사람을 남겨 두고 가라는 해신(海神)의 지시를 받았다.

다음 날 떠나려 하니 예상하지 못한 풍파가 일어 배를 띄울 수가 없었다. 며칠을 기다렸으나 바람이 멎지 않으므로 순회사는 꿈을 생각하고 동남동녀에게 태하리에 가서 두고 온 담뱃대를 가져오라 명하였다. 태하리로 가는 남녀를 뒤로 한 채 돛을 올리자 배는 순조롭게 항해할 수 있었다.

담뱃대를 가져온 두 남녀는 사라지는 배를 원망하며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몇 년 뒤 순회사는 다시 울릉도에 들어와 순회하게 되었다. 이 때 태하리에서 두 남녀가 꼭 껴안은 형상으로 백골이 된 것을 보았다. 이에 고혼을 달래기 위해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3월과 9월에 풍년과 해상의 안전을 비는 제사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저동리의 촛대바위는 고기잡이 나간 아버지를 기다리던 딸이 바위로 변한 것으로 효녀바위라고도 한다. 흉년에 식량이 떨어져 바람이 부는데도 아버지가 고기잡이를 나서자 하나뿐인 딸은 날마다 아버지 걱정에 침식을 잊고 눈물로 보냈다. 어느 날 아버지가 올 것 같아 바닷가에 나간 딸은 꿈인 듯 생시인 듯 떠오르는 배를 맞아 바닷속으로 들어가 우뚝 서서 기다리다가 바위가 되었다고 한다.

이 밖에도 장군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하여 성인봉의 혈을 자른 이야기, 우산국의 우해왕 설화, 지네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 등이 다양하게 전한다.

애정요 · 망향요 · 섬 찬양요 · 노동요 · 집살이요 · 생활요 · 만가 등이 다양하게 전승한다. 이들 가운데 망향요와 섬 찬양요 등은 울릉도에서 순수하게 생겨난 민요이다. 그러나 그 밖의 노래들은 내륙의 이주민들이 각기 제 고향의 민요를 가져와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대체로 대구 · 경산 · 달성 · 의성 · 김천 등 경상북도 일대의 민요가 많으며, 함안 · 예산 · 부여 등지의 민요도 더러 섞여 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부르는 노래에서는 “울릉도 고개는 자물통 고개야/들어가긴 들어가도 나올 줄은 모르네.” 하고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지만, 오래 살다 보면 종국에는 정이 드는 것이니 긍정적인 생활을 하자며 울릉도의 자랑거리를 여러 가지로 민요 속에 끼워 넣기도 한다.

애정요도 여러 편 전승된다. 사설의 화자를 남성으로 설정해 놓은 것이 흔히 보인다. “날 오라네 날 오라네, 산골 큰애기가 날 오라네.”라고 시작하는 민요는 맛난 음식을 해놓고 자기를 부른 여성을 생각하며 흥겨워하는 남성의 모습을 계속되는 소박한 어구의 반복으로 적절히 그려내고 있다.

산업 · 교통

2008년 현재 농가인구가 1,560명으로 전체인구의 15.4%이며, 어가인구는 1,743명으로 전체인구의 17.2%이다. 총 경지면적이 12.879㎢로 거의 다 밭이며, 경지율은 약 18%에 불과하다. 그나마 밭도 경사 15∼20°의 산전(山田)이 대부분이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감자 · 보리 · 콩 · 수수 등이고, 배추 · 고추 · 마늘 등 채소를 많이 생산한다. 가축은 소 · 산양과 사슴 · 개가 사육된다. 그리고 산간지대에서는 당귀 · 지황 · 황기 · 천궁 등의 약초를 생산한다. 임야 면적은 전체 면적의 84%를 차지하며, 입목 축적은 93만 3885㎥이다.

근해에서는 오징어 · 명태 · 꽁치 · 새우 · 미역 · 전복 등이 많이 잡힌다. 특히 근해에서 잡히는 오징어는 맛이 좋아 특산물로 유명하다. 울릉도오징어는 잡은 즉시 태양열에 말려 신선하고 달짝지근하다. 마른오징어 이외에도 오징어 내장을 주재료로 얼큰하게 끓인 오징어내장탕과 오징어불고기 · 오징어순대 등도 별미로 유명하다.

울릉도 호박엿도 맛이 좋고 영양이 많아 유명하다. 요즘은 가락엿 · 판엿 · 당엿 · 물엿 · 범벅엿 등 다양한 제품이 선보이고 있다. 그 외의 특산물로는 약소 · 천궁 · 취나물과 향나무 공예품 등이 있다. 약소는 산에서 나는 약초와 산나물을 뜯어먹고 자란 소와 염소로 몸보신용으로 아주 좋다. 특히 섬바디라는 먹이풀을 먹고 자라는 죽도의 약소가 유명하다.

그리고 토질 좋고 바람 많은 나리분지에서 자란 천궁은 피를 맑게 하고 고혈압 · 비만 방지에 특효가 뛰어나 한약재상들에게 인기가 좋다. 울릉도의 취나물은 눈 속에서 자란 무공해 취나물로 독특한 향내로 미각을 돋군다.

한편, 북면 천부리의 송곳산(錐山, 606m) 산기슭에 국내 유일한 용천수(涌泉水)인 추산수력발전소가 있는데, 발전량은 약 1,400㎾이다.

상업활동을 보면, 울릉도는 본래 빈 섬이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인구가 늘기 시작했으므로 육지와의 교통이 불편하여 시장을 통한 상업활동은 없었다. 1982년 울릉읍 도동리에 사설 울릉종합시장이 상설로 개장되었으나 교통 여건의 미비로 1983년 폐지되었다.

대신 1개의 수산업협동조합 연쇄점, 3개의 농업협동조합 연쇄점 및 수산업협동조합 저동리위판장이 개설되었다. 아직 시장이 형성되지는 않았고 11개 도매상이 육지로부터 가져오는 각종 물자를 가맹소매점에 공급한다. 오징어 · 약초 · 산나물이 육지로 반출되고 각종 농수산물과 공산품 · 생활용품이 반입된다.

교통은 지방도가 섬 해안을 따라 개설되었으며, 육지와는 도동∼포항, 도동∼묵호, 저동∼후포 간 여객선이 운항된다.

관광

험준한 화산도인 울릉도는 해안에 기암절벽과 기묘한 섬이 많고 특산식물이 많아 육지와는 다른 특이하고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을 지닌 도서관광지로서 ‘식물관광’을 빼놓을 수 없다. 울릉도 전역에는 해안식물에서 고산식물까지 무려 575종에 이르는 다양한 식물들이 자생하고 있다.

성인봉은 천연기념물을 포함한 각종 식물들이 군락을 지어 자연식물원을 이루고 있다. 너도밤나무 · 홍만병초 · 섬단풍나무 · 섬피나무 · 섬바디 · 삼나무 등의 희귀 수목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성인봉 원시림, 고비 · 미역취 · 부지갱이 · 다래 · 마가목 등의 진귀한 산나물과 열매가 자라고 있다.

성인봉은 대개 도동리에서 산행을 시작하여 대원사를 거쳐 관모봉에 올라서면 숲이 울창한 능선길이 정상까지 이어진다. 정상에서는 섬 전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또 울릉읍 저동리에서 등산로를 따라 1.6㎞ 정도 오르면 원시림 사이로 높이 25m, 너비 1m의 3단폭포인 봉래폭포를 거쳐 관모봉 · 성인봉 정상으로 오르기도 한다.

울릉읍 저동리봉래폭포 주변에는 한여름에도 4℃의 냉풍이 바위틈에서 불어 나오는 풍혈과 삼림욕장이 있다. 북면 나리리의 나리분지는 울릉도의 유일한 평야지대로 화산이 폭발하면서 생성된 거대한 분화구이다. 대지는 60만 평에 이른다. 동남부와 서남부는 높이 500m의 단애로 둘러싸여 있고 북부는 성인봉에서 흘러내린 산들로 막혀 있다.

나리분지는 토질이 좋고 물이 풍부하여 식물이 성장하기에 더 없이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었다. 그리하여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울릉도 국화와 섬백리향이 군락을 이루며 자생하고 있다. 또한 국가유산으로 지정 · 보호되고 있는 울릉도 개척 당시의 너와집 · 투막집도 볼 수 있다.

울릉도 관광은 관광유람선으로 섬 일대를 일주하는 방법과, 자동차로 저동 · 도동 · 통구미를 연결하는 12㎞의 해안일주도로로 해안의 절경을 둘러보는 방법이 있다. 관광유람선은 도동항에서 출발하여 사동 · 남양 · 태하 · 천부 · 저동을 거쳐 다시 도동으로 되돌아온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통구미 거북바위이다. 이어 서면 남양리 해안의 사자암과 투구봉과 앞바다의 만물상 · 곰바위, 태하리의 자연동굴, 천연기념물인 대풍령 향나무 자생지, 북면 앞바다의 공암 · 삼선암 · 관음도 · 죽도 · 북저바위와 촛대바위를 거쳐 3시간 정도 관광이 이뤄진다. 울릉읍 도동리에는 탄산광천수로 철분 · 칼슘 · 마그네슘 등이 함유되어 류머티즘 · 피부병에 효과가 있는 도동약수가 있다.

울릉도오징어축제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울릉도오징어와 관련한 고유한 향토문화를 소재로 하여 2001년부터 개최된 관광이벤트 축제이며, 관광성수기인 7월 울릉도를 찾는 여행객들에게 다양한 체험과 관람을 통하여 울릉도 오징어 품질의 우수성과 차별성을 홍보하고, 볼거리,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여객선이 본도와 포항 · 후포 · 묵호 간을 왕래하며 관광객이 많다.

읍 · 면
  1. 울릉읍(鬱陵邑)

군의 동남부에 위치한 읍. 면적 21.40㎢, 인구 7,221명(201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도동리이다. 본래 남면(南面)지역이었으나 1906년 일부를 분할하여 서면에 편입시켰다. 1979년에 남면이 울릉읍으로 개칭, 승격되었다.

성인봉의 동쪽 사면에 있어 평지가 매우 좁아 취락이 해안에 집중되어 있다. 부속 도서로는 촛대바위[燭臺巖] · 북저바위 · 청도 · 죽도(竹島) · 독도(獨島)가 있다.

총 경지면적은 4.43㎢로 20.8%, 임야면적은 15.37㎢로 72.2%, 기타 7.0%로 이뤄져 있다. 경지 중 밭이 4.36㎢로 98.4%를, 논이 0.07㎢로 1.6%를 차지하며 밭농사가 주류를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감자 등이지만 경지가 적으므로 농업활동이 미진하다. 근해에 양호한 어장이 있어 어업이 성하다. 주로 오징어를 잡으며, 명태 · 꽁치 · 새우 · 미역 등을 어획한다.

즉, 도동리는 항만으로서 가장 좋은 조건을 갖추어 이 지역 교통의 중심지이다. 육지와 울릉도 간 정기여객선과 울릉도 해안일주 관광유람선의 출발지이다. 또한 도동항을 중심으로 2개의 간선도로가 해안일주도로로 개설되어 있다. 저동항은 군 최대의 어업 전진기지로 개발되었고, 사동리는 농업중심지인데 사동항은 도동항의 부속항 구실을 한다.

문화유적은 도동리에 도동약수터가 있다. 그리고 섬개야광나무 · 섬댕강나무군락과 독도해조류번식지가 있다. 사동리에는 흑비둘기서식지와 울릉도관광농원이 있으며, 저동리에 봉래폭포 · 보덕사 · 촛대바위 등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2개 교, 중학교 2개 교, 고등학교 1개 교가 있다. 도동(道洞) · 저동(苧洞) · 사동(沙洞) 등 3개 리가 있다.

  1. 북면(北面)

군 북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24.27㎢, 인구 1,431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천부리이다. 1900년 군제의 실시로 석포 · 천부 · 나리 · 평리(平里) · 현포 · 태하 · 학포(鶴圃) 등의 지역을 관할하였다. 그러나 1906년 서면과 북면의 2개 면으로 분할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3개 리로 개편되었다.

향목령(香木嶺, 297m) · 초봉(草峰, 608m) · 미륵산(彌勒山, 901m) · 성인봉(聖人峰, 984m) 등이 남쪽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 갈수록 점차 지형이 낮아진다. 면의 중앙 남부의 나리분지 북서부에는 중앙화구인 알봉[卵峰, 538m]이 있고, 분지 주변에 송곳산(604m) · 형제봉(兄弟峰, 712m) · 미륵산 · 성인봉 등이 외륜산을 이루며, 해안은 급격한 낭떠러지이다.

총경지면적은 5.01㎢로 20.6%, 임야면적은 18.03㎢로 74.2%, 기타 5.02%로 이뤄져 있다. 경지 중 밭이 4.48㎢로 96.6%를, 논이 0.17㎢로 3.4%를 차지하여 밭농사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감자 등의 잡곡이며, 마늘 · 고추 · 약초 등도 생산한다. 천부항 · 현포항을 중심으로 어업이 이뤄져 오징어 · 명태 · 꽁치 등을 잡지만 겨울의 강한 북풍을 막을 만한 어항이 없는 것이 발전의 장애요인이다.

송곳산 아래 추산마을에 추산수력발전소가 있다. 도로는 해안을 따라 울릉도를 일주하는 지방도가 있으며, 육지와의 연결은 울릉읍 도동리를 통한다.

문화유적으로는 천부리의 고분을 비롯해 관음도와 관음굴 · 삼선암 · 공암 등의 해식 지형과 해안의 절경, 현포리의 고분 등이 있다. 그리고 나리는 울릉국화 · 섬백리향군락 · 성인봉의 원시림 · 너와집 · 투막집 등 독특한 관광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나리마을 북쪽 끝에 물맛이 달고 시원하기로 소문난 신령수가 있다.

문화유적은 현포리의 고분군과 성지(城址) · 누석총(累石塚) 등의 출토품으로 미루어 고대 우산국의 도읍으로 추측된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가 있다. 천부(天府) · 나리(羅里) · 현포(玄圃) 등 3개 리가 있다.

  1. 서면(西面)

군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은 28.19㎢, 인구 1,002명(2015년 현재). 면 소재지는 남양리이다. 1906년 남면의 남양 · 석문(石門) · 통구미(通九味) · 남서 · 구암(龜巖) 등 5개 리와 북면의 태하 · 학포 등 2개 리를 합해 서면을 설치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3개 리로 개편되었다.

면의 동쪽과 북쪽은 향목령(香木嶺, 297m) · 초봉(草峰, 608m) · 미륵산(彌勒山, 901m) · 성인봉(聖人峰, 984m) · 가두봉(可頭峰, 194m)을 연결하는 산릉이 에워싸고, 남쪽은 해식애로 둘러싸여 있는 험준한 산지이다. 이 산지를 태하천(台霞川) · 남서천(南西川) · 남양천(南陽川) 등이 개석(開析)하고, 그 침식곡에 취락이 들어서 있다.

총 경지면적은 3.55㎢로 13.1%, 임야면적은 22.07㎢로 81.2%, 기타 5.7%로 이뤄져 있다. 경지 중 밭이 3.30㎢로 93.0%를, 논이 0.25㎢로 7.0%를 차지하여 밭농사가 대부분을 이룬다. 주요 농산물은 옥수수 · 감자 · 마늘 등이며, 당귀 · 천궁 · 질경 등도 생산된다.

어업으로는 오징어 · 명태 · 꽁치 등이 주어획물이며, 태하리 · 남양리에 양항이 있으나 소규모이다. 남양리의 지통골에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하여 한지(韓紙)를 생산했다고 한다.

도로는 해안을 따라 울릉도를 일주하는 지방도가 있으며, 육지와의 연결은 울릉읍 도동리를 통한다. 문화유적은 남서리의 고분군 · 거북바위가 있다. 그리고 남양리 통구미의 향나무자생지, 태하리 대풍감의 향나무자생지와 솔송나무 · 섬잣나무 및 너도밤나무군락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 중학교 1개 교(분교 1개 교)가 있다. 남양(南陽) · 남서(南西) · 태하(台霞) 등 3개 리가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고려사(高麗史)』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울릉군통계연보』(울릉군, 2008)
『경북통계연보』(경상북도, 2005)
『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3)
『한국지지』(건설부국립지리원, 1985)
『한국관광자원총람』(한국관광공사, 1985)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경상북도교육위원회, 1984)
『한국관광자원론』(정승일, 형설출판사, 1984)
『경상북도사』(경상북도사편찬위원회, 1983)
『개척백년 울릉도』(울릉군,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울릉도』(울릉군, 1981)
『울릉도 및 독도종합학술조사보고』(한국자연보전협회, 1981)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9)
『울릉도의 민요와 가사』(서원섭, 형설출판사, 1979)
『울릉도의 전설·민요』(여영택, 정립사, 1978)
『경북향토자료지』(경상북도교육위원회, 1972)
울릉군(www.ulleung.go.kr)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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