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종이 바탕에 담채. 세로 38.5㎝, 가로 20.5㎝. 윤두서 자화상은 상용형식이나 표현기법 등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화폭 가득히 묘사된 안면은 윤두서의 자아인식의 수준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의 자화상은 문헌상으로 보면 이미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듯 「공민왕조경자사도(恭愍王照鏡自寫圖)」가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叟記言)』에 보이며, 김시습(金時習)에게도 노소(老少) 두 자화상이 있었음이 『매월당집(梅月堂集)』에 보인다. 18세기에 들면 이광좌(李光佐), 강세황(姜世晃)의 자화상 등도 전해온다.
이러한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 자화상은 보는 사람이 정시할 수조차 없으리만큼 화면 위에 박진감이 넘쳐 흐르는데, 자신과 마치 대결하듯 그린 이런 자화상은 전후를 막론하고 우리나라 초상화에서 그 유례를 찾을 수 없다.
윗부분이 생략된 탕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는 눈, 꼬리 부분이 치켜 올라간 눈썹, 잘 다듬어진 턱수염, 살찐 볼, 두툼한 입술에서 윤두서라는 인물의 성격과 옹골찬 기개를 읽을 수 있다.
화법은 당대의 기법을 응용하여, 안면은 깔끔한 구륵(鉤勒)보다는 오히려 무수한 붓질을 가하여 그 붓질이 몰리는 곳에 어두운 색조가 형성되게끔 하였다.
또한, 이 화상에서 점정(點睛)의 효과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효과를 십분 거두고 있다. 또한 그다지 많지 않은 연발수(蓮髮鬚) 형태의 수염이 안면을 화폭 위로 떠밀듯이 부각시킨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독특하게 얼굴 부분만 나타나 있어 더욱 강한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윤두서가 처음 자화상을 그렸을 때는 반신상으로 제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1937년 편찬된 『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에는 유탄으로 도포 형상이 간단하게 그려져 있었고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행한 X-선 조사와 X-선 형광분석기를 이용한 안료 분석에서 원래는 귀까지 그렸던 것으로 나타났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종이에 먹선으로만 그려져 있지만 본래 초본으로 그려진 것인지 아니면 완성작으로서 그려진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윤두서의 친구 이하곤(李夏坤)은 『두타초(頭陀草)』에, “윤효언이 스스로 그린 작은 초상화에 찬한다.”는 찬시를 남겼다. 이 작품에 대한 시로 추정된다.
1937년 편찬된 『조선사료집진속(朝鮮史料集眞續)』(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1937)에 「윤두서 자화상」 도판이 수록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자화상의 몸체가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X-선 촬영 및 X선 형광분석기(XRF)에 의한 안료 분석결과를 보면 채색을 이용한 배채 기법도 확인되었다. 특히 수염 위로 귀의 윗부분에도 배채된 흔적이 있다.
윤두서는 그의 친구였던 심득경(沈得經)의 초상화를 추화(追畵)한 바 있으며, 그때 화폭 속에 그 인물이 지닌 특징적인 분위기 표출에 성공함으로써 전신사조(傳神寫照)에 뛰어남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이 자화상에는 심득경상에서 표현하였던 분위기 이상의 핍진력이 유감없이 발휘됨으로써 탁월한 가작으로 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