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명균(銘均). 경상북도 김천 출신. 1915년 데라우치[寺內正毅]가 해인사를 방문할 때 편강렬(片康烈)과 함께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자, 편강렬을 40일간 은신시킨 뒤 여비를 주어 만주로 망명시켰다. 3·1운동 때에는 경상남북도에서 활약하였다.
유림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하여 일본경찰에 붙잡혔으나, 대구지방검찰청 검사국에서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20년 3월경상북도 김천에서 김찬규(金燦奎)·신태식(申泰植)·이응수(李應洙) 등과 해외독립운동단체와 긴밀히 호응하여 국권회복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조선독립운동후원의용단(朝鮮獨立運動後援義勇團)을 조직하고 경상북도 재무총장에 취임하였다.
또한, 가산이 부유하여 전후 5회에 걸쳐 10여 만 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냈다. 그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다액의 군자금송부에 대한 감사의 뜻을 전달받음과 동시에 후원의용단의 단장과 재무총장에 임명되었다.
그뒤 경상남북도 각지에서 군자금모금활동을 전개하던 중 1922년 11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고 발병하여 예심도중인 이듬해 3월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순국하였다. 구속될 당시 송금하지 못한 군자금 8만 3000원을 보관하고 있었으나 압류되었다.
한편, 3,000여 석의 자산도 군자금으로 봉압되었으며, 그 뒤 가산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1970년경상북도 김천에 순국기념비가 세워졌다.
1963년 대통령표창이,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