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협(景協), 호는 정산(貞山). 사헌부지평 이지안(李志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실학자 이익(李瀷)의 숙부인 이명진(李明鎭)이다. 아버지는 이침(李沉)이며, 어머니는 조석제(趙錫悌)의 딸이다.
형 이용휴(李用休)는 문학적인 면에서 양명학(陽明學)을 수용했고, 조카 이가환(李家煥, 이용휴의 아들)은 공조판서를 지냈는데, 1801년(순조 1) 신유사옥(辛酉邪獄) 때 천주교 신자로 몰려 죽임을 당하였다.
이익의 형인 이잠(李潛)의 양자로 들어갔고, 자신은 이삼환(李森煥)을 양자로 들였다. 양부인 이잠은 기사환국 후 경종의 보호를 내세우는 소를 올렸다가 노론에게 역적으로 몰려 장살되었다.
정치적으로 근기남인에 속하였다. 13세 내지는 14세부터 이익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나, 노론에 의해 역적의 양자로 지목되어 관계 진출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익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키는 일로 일생을 보냈다.
이익의 대표적인 제자들인 윤동규(尹東奎)·신후담(愼後聃)·안정복(安鼎福) 등과 학문적으로 깊이 교류하였다. 각자의 문집 속에 서로 학문에 대해 토론한 글들이 다수 수록되어 전해진다. 학문적인 면에서 볼 때 이병휴는 이익의 제자들 가운데서 가장 급진적인 성향을 나타냈다.
이익의 학문 중에서도 진보적인 면을 주로 계승, 발전시켜, 윤동규·안정복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주자학의 권위에 구애받지 않고 경전을 자주적으로 해석하였다. 그 결과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즉 주자학은 결함을 지닌 불완전한 것이므로 당연히 뒷사람이 그 결함을 변론해 완성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입장은 왕양명(王陽明)의 주자학에 대한 태도와 일치한 것이었다. 또한 양(楊)·묵(墨)·노(老)·불(佛)과 같은 것은 비록 성인의 학문과 다르고 인의(仁義)를 배움에 차이가 있지만, 결코 이욕(利慾)을 추구하지 않으므로 그것들을 이단으로 배척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도 양명 후학인 태주학파(泰州學波)의 이단에 대한 태도와 같다.
또한 주자의 『대학장구』를 배격하고 고본 『대학』의 체재를 타당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나, 도덕적인 이치에 대해서는 누구나 선천적으로 알 수 있으므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같은 지(知)에 관한 공부는 필요 없기 때문에 행(行)에 관한 공부인 성의(誠意)를 제1의 공부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 심(心)의 성(性)을 지선(至善)으로 해석한 것,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을 같은 일로 보고 ‘성의’를 ‘명명덕’과 ‘신민’의 공부로 삼은 것 모두 왕양명의 주장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양명의 경우 ‘친민(親民)’을 통한 ‘명덕’의 시련은 효제자(孝悌子)의 덕목으로 나타나고, 또한 효제자의 사상은 그 뒤 좌파인 나여방(羅汝芳) 등이 학문의 종지로 삼았으므로 이병휴가 ‘명명덕’과 ‘신민’을 ‘효제자’로 본 것도 양명학의 학설과 합치된다.
아울러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에서 이병휴가 이기(理氣)의 개념을 사실세계의 이기[汎說의 理氣]와 가치세계의 이기[非汎說의 理氣]로 구분한 다음에 인심도심에 대해 이발기발(理發氣發)이라고 할 때의 이기는 가치세계의 이기에 해당된다고 주장해, 인심도심설을 가치방면에 국한시켜 논한 점이나, 가치세계의 이치와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앎을 선천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으로 구분한 것도 왕양명의 입장과 같거나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와 같이 이병휴의 유교사상이 양명학에 입각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사실을 표면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다. 이병휴는 양명학의 전문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정주(程朱)의 설을 끌어다가 자신의 논거로 삼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동료들도 경전에 대한 이병휴의 자의적 해석을 비판하면서도 그것을 양명학으로 의심하거나 배척하지는 않았다.
이병휴가 양명학을 수용하게 된 것은 이익의 실학사상이 본래 내포하고 있는 이론적 모순의 해소와 관련이 있었다. 이익은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정주학이 아니라 육경(六經)이나 사서(四書)에 두었다.
정주학은 송대에 송나라 사정에 따라 경전을 해석한 것이므로 이익이 살던 시대의 당면한 제반문제에 그대로 적용할 수 없다고 이해하였다. 조선의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상황에 맞게 경전을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고 보았다.
우선 이병휴는 “행하고 남은 힘이 있거든 글을 배운다.”고 한 공자의 말을 근거로, 덕을 이루는 공부를 실천 위주로 전환해 선진유학(先秦儒學)에서와 같이 효제(孝悌)를 공부의 주된 것으로 삼고, 교제도 『논어』와 『효경』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부하게 한 다음에 가르친다.” 고 한 공자의 말을 근거로, 덕을 이루는 효제의 공부만으로는 당면한 정치·사회·경제·국방 등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다고 보고, 당시의 역사적인 어려운 문제의 해결을 추구하는 사공(事功)에 관한 학문도 아울러 힘써 탐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덕을 이루는 학문과 사공에 관한 학문을 별개로 구분한 뒤 어느 한쪽만 추구하는 것은 결함이 있기 때문에 양쪽을 다 탐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인식 위에서 당면한 제반 문제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도록 옛 성현의 경전과 중국 및 우리나라의 역사에 관한 책은 물론이고 개인 문집이나 서양 과학기술에 관한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 등까지도 두루 섭렵해, 정치·경제·사회·국방·외교 등에 대한 백과사전적인 지식을 갖추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이익의 이러한 실학사상은 아직 이론적으로 체계화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사실과 가치 세계를 확연히 구분해 이(理)와 기(氣)의 개념도 사실과 가치에 관한 측면으로 이원화하고, 그 인식 방법도 선천적·경험적인 것으로 구별한 이병휴의 양명학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탐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한 점에서 이병휴의 양명학은 다른 학파의 양명학과 구별된다. 예컨대 이병휴의 양명학은 실학적 양명학이라 할 수 있다. 이병휴는 만년에 선영이 있는 충남 예산에 살면서 제자를 양성하였다. 문하생으로는 우선 이기양(李基讓)이 주목된다.
이기양은 1764년경부터 이병휴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병휴의 영향으로 양명학을 정면으로 수용하였다. 또한 이기양을 통해 양명학을 수용한 권철신(權哲身)도 1768년경부터 이병휴의 문하에 드나들면서 학문을 닦았다.
그리고 이기양과 권철신에 의해 양명학은 그들의 동료인 한정운(韓鼎運)·이가환(李家煥)·권일신(權日身) 등과 그들의 문도인 정약전(丁若銓)·이벽(李檗)·이승훈(李承薰) 등에게 전파되어 성호학파 소장학자들의 지배적인 학문으로 발전해 갔다. 이들 소장 양명학자들은 뒤에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 수용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와 같이 그들이 서양 과학기술과 천주교의 수용에 있어서 특별한 반응을 나타낸 것은, 이익의 실학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해 덕을 이루는 학문을 선진 유학에서와 같이 실천 위주로 전환하고, 사실세계의 이치에 대한 적극적인 탐구를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이병휴의 실학적인 양명학을 그들이 계승한 것과 깊은 관련이 있었다.
오로지 학문만을 연구하며 일생을 보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정산잡저(貞山雜著)』·『심해(心解)』·『정산고(貞山稿)』·『정산시고(貞山詩稿)』 등이 있다. 이 중 『정산잡저』는 서간(書簡)·서문(序文)·발문(跋文)·논(論)·설(說)·변(辨)·고(考) 등을 대체로 연대순으로 묶어 놓은 것으로 이병휴의 문집에 해당한다.
『심해』는 이익의 『질서(疾書)』와 같이, 평생 여러 경전을 공부하면서 깊이 사색을 통해 얻은 독창적인 견해들을 모아 놓은 것으로서 이병휴의 유교사상을 체계적으로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하지만 『순암총서(順菴叢書)』에 들어 있는 『대학심해(大學心解)』를 제외한 나머지는 오늘날 전해지지 않고 있다. 『정산고』는 권철신(權哲身)이 『정산잡저』에 수록된 글들을 골라 엮은 것이고, 『정산시고』는 시를 모아 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