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우촌 ()

목차
천주교
개념
천주교인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박해 시기에 산간벽지에 조성한 천주교공동체. 신앙촌.
내용 요약

교우촌은 박해 시기에 천주교인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산간벽지에 조성한 천주교 공동체이다.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이다. 교우촌들은 박해를 피하기 위해 여러 고을의 경계가 접한 깊은 산골에 자리 잡았다. 1836년 이후 선교사들은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고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다. 1886년 한불조약 체결로 종교 자유가 묵인된 후, 신자들이 평야 지역이나 도시 지역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신자들이 성당 주변으로 이주해 감에 따라, 산간벽지의 교우촌들은 점차 그 의미나 기능을 상실하였다.

목차
정의
천주교인들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하여 박해 시기에 산간벽지에 조성한 천주교공동체. 신앙촌.
연원 및 변천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한 시기는 1791년(정조 15) 신해박해 이후이다. 신해박해로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이 참수형을 당하자, 인접한 전라도 북부 지역과 충청도 남부 지역의 신자들은 박해를 받지 않고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산간벽지로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을 중심으로 고산 저구리와 청양 다락골의 산골짜기에, 그리고 경기도 남부의 산간 지역에도 교우촌(敎友村)이 형성되었다. 1801년(순조 1) 신유박해 이후에는 교우촌의 형성이 더욱 활발해져,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남부 산간에 교우촌이 만들어졌고, 1839년(헌종 5) 기해박해 이후에는 경상도 남부와 전라도 남부 지역, 그리고 아직 신앙 전파가 없던 다른 지역에서 새로운 교우촌들이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교우촌들이 자리한 곳은, 광주·용인·이천 고을의 접경 지역인 태화산 자락이나 서천·한산·홍산·비인 고을의 접경 지역인 천방산 자락, 그리고 여산·고산·은진 고을의 접경 지역인 천호산 자락 등 대체로 여러 고을의 경계가 접하고 있는 깊은 산골이었다. 이러한 접경 지역에 형성된 이유는 박해가 발생하더라도 다른 고을로 쉽게 피할 수 있어 체포를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박해가 거듭될 때마다 아직 천주교 신앙이 전파되지 않은 더 넓은 지역으로 교우촌이 확산되면서, 나라의 가장 궁벽한 구석까지 복음이 퍼져 나갔다. 이 일을 두고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는 “박해의 폭풍이 오히려 복음의 씨를 더 멀리 날렸다.”라고 평하였다. 되풀이되는 정부의 가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교우촌을 통해 신앙생활을 다져가며 더욱 발전하였다.

박해 시대의 교우촌은 신자들의 일생생활과 신앙생활을 이끌어 가는 회장을 중심으로 사도시대 초대 교회의 모습처럼 공동생활을 하였다. 교우촌의 신자들은 일반 백성들이 살 수 없는 험준한 산골에서 담배 농사를 짓거나 옹기 만드는 일 등을 하면서 몹시 가난하게 살았지만, 미덕으로 서로를 위하여 베푸는 사랑과 정성이 지극하였고, 가난하지만 신분의 차별도 없이 가진 재물을 서로 나뉘어 가지고 생활하였다. 또한 그들은 명예와 재산과 이 세상의 안일을 돌보지 않고, 복음과 복음 말씀을 설명한 성인들의 말씀을 외우며 실행에 옮겼다.

결국 신유박해 이후에는 천주교회가 교우촌을 중심으로 유지되고 운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1836년(헌종 2) 이후 잇달아 입국한 프랑스 선교사들은 전국에 흩어져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신자들을 찾아 방방곡곡을 방문하였고, 교회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는 곳마다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여 회장을 임명하거나 승인하였다. 또한 어린이 대세(代洗)와 혼인, 장례, 주일과 큰 축일의 집회, 싸움과 소송의 판단 등 가장 긴급한 모든 것에 관한 규칙을 정해 줌으로써 신자 집단의 조직을 새로 만들거나 보충하였다. 1850년(철종 1)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전국적으로 185개의 공소가 있었으므로 교우촌은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1861년 베르뇌 주교가 전국을 8개 지역으로 나누어 각각 전담 선교사를 임명하였을 때, 그 중심지로 설정된 곳들도 모두 유명한 교우촌이었다.

1886년(고종 23) 한불조약의 체결로 종교의 자유가 묵인된 뒤에도 한동안은 여전히 교우촌을 중심으로 천주교회가 운영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신자들이 좀 더 살기 좋은 평야 지역으로 이주해 가고, 또한 앞으로 발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교우촌에서 떨어진 평야 지역이나 도시 지역에 본당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교우촌의 신자들이 미사를 드리기 위해 성당 주변으로 대거 이주해 감에 따라, 산간벽지의 교우촌들은 갈수록 위축되어 점차 그 의미나 기능을 상실하였다.

참고문헌

「교우촌의 교회사적 의의」(이원순, 『교회와 역사』374, 2006)
「교우촌의 형성과 신앙 생활」(차기진, 『교회와 역사』246, 1995)
「천주교 교우촌의 상태: 전라북도를 중심으로」(김진소, 『남민』4, 1992)
집필자
서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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