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백옥(伯玉), 호는 저헌(樗軒). 사복시정 이장(李庄)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임천부사 이종무(李宗茂)이다. 아버지는 대호군 이회림(李懷林)이며, 어머니는 박언(朴彦)의 딸이다. 김반(金泮)의 문인이다.
1441년(세종 23)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 이어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사간원정언에 제수되었다.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직전(直殿)·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응교로 재임한 1447년 문과 중시에 합격했으며, 왕명으로 진관사(津寬寺)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 문흥을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독서에 전념하도록 휴가를 주던 제도)로 학문에 진력하였다.
1455년(세조 1) 첨지중추원사, 뒤에 전라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1456년 6월,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전해지자 사육신의 절의를 상징하는 시를 지어 익산 동헌에 남겨서, 치죄하자는 대간의 여론이 있었으나 세조에 의해 묵살되고 오히려 예조참의에 올랐다.
1457년 판공주목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원사로 잠시 한직에 있었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한성부윤이 되었다.
1460년 세조의 특명으로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왕의 서쪽 지방 순행을 도와, 세조로부터 서도주인(西道主人)이라 불리기까지 했다 한다. 이듬해 사헌부대사헌을 거쳐 경기관찰사를 역임하고, 1462년 호조참판을 거쳐 판한성부사에 7년 동안 재임하였다.
1466년 팔도도체찰사를 겸해 호패법을 철저히 고핵(考覈: 조사해서 밝힘)해 정리하였다. 1468년 세조가 죽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470년(성종 1) 판중추부사에 오르고 지성균관사를 겸해 주문(主文)의 위치를 맡았다. 1471년에는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졌다. 필법이 신묘하고, 집현전학사로 있을 때 『치평요람』·『고려사』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세조 때에는 사서(四書)의 구결(口訣) 작업에 참여해 『논어』의 구결을 주관하였다. 만년에는 성균관 서쪽에 계일정(戒溢亭)을 짓고 시문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대학연의(大學衍義)』와 『고려사』에서 권계(勸戒)를 덧붙인 『대학연의집략(大學衍義輯略)』 21권과 『저헌집(樗軒集)』이 있다. 편저로는 『역대병요(歷代兵要)』·『치평요람(治平要覽)』 등이 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