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양성(陽城). 자는 윤보(胤保), 호는 삼탄(三灘). 고려조 시중 이춘부(李春富)의 현손이며, 이옥(李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사근(李思謹)이다. 아버지는 병조판서 이온(李蒕)이며, 어머니는 이회(李薈)의 딸이다.
1438년(세종 20) 17세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1447년(세종 29)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집현전부수찬(集賢殿副修撰)에 임명되었다. 이어 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에 승진하고, 1454년(단종 2) 장령(掌令)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하자 집현전직제학으로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이듬해 예문관응교를 지내고, 1458년(세조 4) 예조참의가 되어 『초학자회언해본(初學字會諺解本)』을 찬정하였다. 이어 형조와 호조의 참의를 거쳐 1459년 사은사(謝恩使)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조참의·예문관제학을 지냈다. 1462년 예문관제학으로서 사성을 겸하고, 세조가 지은 『병장설(兵將說)』을 찬수하였다.
1467년 충청도관찰사로 있을 때 병을 얻어 위중하자 국왕이 의약을 내렸다. 예종이 즉위하자 예조참판이 되어 명나라와의 외교 사무를 잘 처리하였다. 1471년(성종 2) 순성좌리공신(純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고, 양성군(陽城君)으로 봉해졌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어 지경연사로서 경연 활동을 크게 일으켰다.
1472년 민간에 산재한 조종의 법전을 수집해 춘추관에 보관했고, 제사(諸史)의 간행·보급을 주청했으며, 1475년에는 교육 강화와 해불론(害佛論)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여러 차례 과거를 주관, 인재 등용에 힘썼으며, 왜인·야인의 접대를 주관하였다.
이어 우참찬이 되고, 1480년 이조·형조의 판서를 역임하면서 신숙주(申叔舟) 등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였다. 1480년 주문사(奏聞使)의 부사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와 그 공으로 노비 6구, 전지 40결을 받았다.
그러나 정사였던 한명회(韓明澮)의 사헌궁각사건(私獻弓角事件)에 연루되어 간관의 탄핵을 받았다. 그 뒤 이조판서·형조판서·우참찬·좌참찬으로서 문명을 날렸으나, 1483년 병이 심해져 사직을 청하자 한직인 지중추부사로 옮겨져 녹봉을 특별히 받았다.
성품은 사물을 접하면 힘써 대체(大體)를 알고자 했고, 널리 독서해 예·악·병(兵)·형(刑)·음양(陰陽)·율(律)·역(曆)에 두루 통달하였다. 특히 문장으로 이름을 남겼다. 청렴해 집안에 꾸민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저서로는 『삼탄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