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고려시대에는 자수가 매우 발달하여 자수미 자체를 완상의 목적으로 하는 감상용 자수가 등장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수도(繡圖)이다. 수도는 장막을 칠 때 사이사이에 드리우거나 가정의 내실에 걸던 일종의 실내 장식품으로, 여기에는 산화(山花)ㆍ희수ㆍ화죽(花竹)ㆍ영모(翎毛)ㆍ과실 따위를 수놓았다고 한다.
이 수도가 발달하면서 그 한 형태로 자수병풍이 나타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계분경도는 구도ㆍ문양ㆍ형태 등에서 송나라 자수의 영향을 다분히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송나라 자수가 물감을 사용하는 등 회수(繪繡)를 지향하는데 반하여, 이 작품은 수사(繡絲)만을 사용하여 자수의 본령을 충실히 지키고 있어, 송수와는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것은 자수 자체의 미적 완성을 추구하는 우리 자수의 전통이 되어 후대에 계승되었다.
또 중앙에 수 놓여 있는 연화 화분과 등(燈), 아래 부분에 보이는 칠보문(七寶文)과 만자문(卍字文)으로 미루어볼 때 불교와 상당한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예로부터 꽃은 차(茶)ㆍ향(香) 등과 더불어 공양물의 대종을 이루던 것으로 분재의 유래와 발달에는 꽃 공양의 작용이 적지 않다. 더욱이 조선시대의 자수에서는 분재라는 소재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 작품과 불교의 관련성을 확실히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은 소재뿐만 아니라 구성 양식과 폭 수(數)에 있어서도 후대의 자수병풍들과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어, 조선시대 이전의 자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자수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