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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저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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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이 필요할 때에 사용하게 하는 인공적 수리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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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흐르는 물을 저장하여 물이 필요할 때에 사용하게 하는 인공적 수리시설.
내용

조선시대 이전에는 막연하게 제언(堤堰)이라 불렀으나, 수리시설의 기능이 분화되면서 최근에는 보(洑) · 방조제(防潮堤) 등과 구분하여 저수지라 불리게 되었다. 저수지는 하천 다음 가는 중요한 지표용수원(地表用水源)으로, 하천용수보다 시설비가 비싼 흠은 있으나 풍부한 물을 확보할 수 있고, 수온도 흐르는 물보다 높아 농업용수로서 보다 유리하다.

저수지는 주로 농업용수를 공급하고, 수력발전 · 상수도 · 공업용수도 공급할 뿐 아니라 관광용으로도 개발될 수 있는 다목적성을 띠어 수자원의 종합적 개발을 추진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의 수리시설은 벼농사의 발달과 더불어 발전되어 왔다. 벼농사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다루왕 6년(33)에 “2월에 영을 내려 남주군에서 벼농사를 시작하였다(二月 下令 國南州郡始作稻田).”는 기록이 있다. 또, 신라본기 일성왕 11년(144)에 “제방을 보수하고 널리 농지를 개간하였다(修完堤防 廣闢田野).”는 기록으로 보아 수도작이 널리 보급되면서 2세기에 들어와 수리시설의 인공적 축조가 비롯된 것 같다.

그러나 저수지의 본격적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흘해왕 21년(330)에 “비로소 벽골지를 축조하였으니 제방의 길이 1,800보였다(始開碧骨池 岸長千八百步).”는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벽골제의 위치는 현재의 전북특별자치도 김제군 월촌면과 부량면의 면계에 위치하고 있어 축조 당시는 백제의 영역이었고, 연대는 330년(비류왕 27)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가 신라의 기년을 기준으로 편찬되었기 때문에 신라본기에 삽입된 것으로 믿어진다.

벽골제의 규모는 제방길이 3,245m, 제방기부(基部)의 너비 21m, 제방상부의 너비 10m, 제방 높이 5.7m, 저수면적 37㎢로 알려진 큰 규모의 저수지로, 국가적 공사가 아니고는 축조할 수 없는 저수지이다. 벽골제는 통일신라 때인 790년(원성왕 6)에 전주 등 7개 고을의 백성을 징발하여 보수한 것을 비롯하여 고려 현종 · 인종, 조선 태종 때에 보수를 거듭하였으나 세종 때에 결괴(決壞:물에 밀리어 뚝 따위가 터져 무너짐)된 뒤 보수하지 않은 채 개답(開畓:맨땅이나 밭을 처음 논으로 만드는 일)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남아 있는 유적은 1980년에 정화한 장생거(長生渠)와 수문석주, 경장거(經藏渠), 반석(盤石)과 선돌[立石], 벽골제비(碧骨堤碑) 등이 있으며, 1967년 동진토지개량조합에서 세운 벽골제사적비(碧骨堤事蹟碑) 등이 있다.

국가적 규모의 큰 저수지는 벽골제 이후 여러 곳에 축조되었을 것이나, 문헌상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861년(경문왕 1)에 축조된 충청북도 제천읍의 의림지(義林池)이다. 의림지는 고을을 다스리던 박순(朴淳)이 축조하고 그의 아호 의림(義林)을 따서 의림지라 이름한 것이나, 일설에는 540년(진흥왕 1)에 악사 우륵(于勒)이 유지(柳池)라 불리던 소규모 저수지를 개축한 것이 의림지의 시원이라는 설도 있다.

의림지의 규모는 ≪세종실록≫ 지리지에 제방의 길이 530척으로 400결(結)의 논에 물을 댈 수 있다 하였고, ≪대동지지 大東地志≫에는 둘레가 5리라는 기록이 있으며, 현재도 물의 깊이가 12m나 되는 것으로 미루어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1194년(명종 24) 개축할 때에 발견된 축조 당시의 기초공사를 보면, 제방 내부의 기초가 흙을 옹기 포개듯이 3층으로 다져 쌓아 누수를 막고, 배수구의 수문은 수톤의 거석을 쌓아 견고하게 축조되었으며, 거석에는 ‘朴義林’이라는 음각글자가 있었다 한다. 1279년(충렬왕 5) 김방경(金方慶)이, 세종 때에는 정인지(鄭麟趾)가 개축하였고, 1919년에는 지방인사 이종진(李鍾震)의 발기로 대개축이 거듭되어 현재도 훌륭한 용수원으로 쓰이고 있다.

전라북도 정주시 고부에 있던 눌제(訥堤)는 약 1,000년 전 견훤(甄萱)의 축조라 하나 분명하지 않다. 제방의 길이 1,200m, 둘레 40리의 꽤 큰 저수지로, 1418년(세종 1) 유희열(柳希烈)과 전라감사가 약 1만 500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개축하였으나 다음해 대홍수로 결괴되어 폐지되었다가, 1916년 고부수리조합(古阜水利組合)이 창설되면서 제방의 중간에 갑문(閘門)을 설치하여 겨울철에만 물을 가두는 최초의 저수답(貯水畓)으로 쓰여져 왔다.

벽골제 · 눌제와 더불어 국중삼호라 일컫던 황등제(黃登堤)는 전라북도 익산군 황등면에 있던 것으로, 제방 길이 1,300m의 흙댐이었다. 현재는 이 제방이 황등∼이리간 도로로 활용되고 있다. 축조연대는 알 길이 없으며, 조선 말엽까지 폐제로 되었던 것을 일제강점기 초기에 개축하여 3,343㏊에 물을 대다가, 1935년 완주군 화산면에 경천(庚川)저수지를 신설하면서부터 황등제의 내부는 모두 개답되었다.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있던 합덕제(合德堤)는 ≪성종실록≫에 ‘합덕제전조시축(合德堤前朝始築)’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이전에 축조된 오래된 저수지로 믿어진다. 규모는 ≪성종실록≫에 “길이 2,700㏊여척으로 7읍에 물을 댔다.”는 것으로 보아 큰 저수지였으며, 성종 초에 개축하였으나 1506년(연산군 12) 왕의 부실 장숙용(張淑容)에게 할급되면서 폐제되고 내부는 개답되었다.

그러나 1778년(정조 2) 인근의 주민 8,053명을 동원하여 결괴된 제방 2개 처를 수축하고, 1792년 6,500명을 다시 동원하여 재수축하여 용수원으로 이용되어 오다가, 예당저수지가 완공되면서 합덕지는 폐지되고 논으로 바뀌었다.

황해도 연안의 남대지(南大池)도 고려 문종 때 비로소 기록 ≪문헌비고≫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오래된 저수지이기는 하나 언제 축조된 것인지 상고할 길이 없다. 둘레가 20리였다는 것으로 보아 규모가 상당한 저수지였으나, ≪성종실록≫에 세조의 동생 영응대군(永膺大君)과 권람(權擥)이 모경(冒耕:주인의 허락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지음)하였다는 사실을 보면 일시 폐제되었던 것 같다.

그 뒤 다시 복구되어 저수지로 활용되었으나, 연산군 때에 장녹수(張綠水)가 또다시 모경한 뒤 완전 폐제되는 곡절을 겪었다. ≪증보문헌비고≫에 1759년(영조 35) 육상궁(毓詳宮)에서 제방 내부를 개답하고자 하다가 중지한 기록이 있음을 보면 장녹수가 사약을 받으면서 다시 저수지로 활용된 듯하다.

경상북도 상주군 공검면에 있는 공검지(恭儉池)는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 때 최빈(崔份)이 개축하였다고 한 사실에 비추어 고려 때 축조된 것으로 믿어진다. 제방의 길이 860보, 둘레 1만 6647척이었다 하니 이 저수지도 규모가 컸음을 알 수 있다. 공검지의 보수에 대해서는 상고할 자료가 없으나 이 저수지는 계속 용수원으로 이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상남도 밀양에 있는 수산제(守山堤)는 삼한시대의 저수지라고 전하여지고 있으나, ≪동국여지승람≫에 세조 때 둔전(屯田)으로 개답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500여년 전에 이미 없어진 저수지이다. 다만 그 둘레가 20리였다 하니, 그 규모는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주시내에 있었던 경양지(景陽池)는 ≪광산읍지≫에 세종 때 김방(金倣)이라는 부자가 자기 농지에 물을 대고자 축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경양지는 우리 나라 최초의 사설저수지라 볼 수 있다. 제방의 길이는 300m 정도이고 저수지의 면적은 약 40㏊ 정도였다 하니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현재는 모두 시가지가 되어 유적도 찾을 길이 없다.

조선 후기에 축조된 저수지로 수원시 서둔동에 있는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1799년(정조 23) 정조가 도성을 수원으로 옮길 계획으로 수원성(水原城)을 쌓으면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서 축조한 저수지이다. 1905년 현재 농촌진흥청을 이곳에 설치하면서 현재까지 시험답의 관개용으로 쓰이고 있다.

이상에서 우리 나라의 역사적 저수지를 살펴보았으나 공검지 · 의림지 · 수산제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한반도의 서해안 쪽에 위치하고 있어 역사적으로 서부가 동부보다 수도작이 발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중소규모의 저수지들은 예로부터 전국 방방곡곡에 산재하였을 것이나, 근대적인 토목기술과 기계를 도입하여 근대적 수리시설이 시작된 것은 1906년 3월에 탁지부령(度支部令) 제3호로 시행된 <수리조합조례 水利組合條例>가 발표되면서 제도적인 윤곽이 비로소 잡히기 시작하였다.

1910년 당시의 수리조합수는 6개 조합이었고, 1909년 전국의 대 · 소저수지는 모두 2,781개였다. 이에서 수리혜택을 본 몽리(蒙利:저수지나 보 따위 수리시설의 혜택을 입음)면적은 7,980㏊로서 1저수지당 평균몽리면적은 겨우 2.9㏊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식민지수탈정책의 하나로 미곡증산을 기하고자 수리시설을 계속 확장하여 1935년에는 8,456개로 증가되고, 몽리면적도 모두 23만 4,000㏊에 이르러 1저수지당 평균 27.7㏊의 몽리면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수지에 의한 몽리면적은 보에 의한 몽리면적 51만 2,000㏊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광복 후 정부는 쌀증산을 기하고자 농업용수 개발에 집중적인 투자를 계속하면서 아산호 · 남양호 · 삽교호 · 대호 · 담양호 · 장성호 · 영산호 등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하였다. 이에 소요되는 자금의 일부는 세계은행 · 아시아개발은행 등을 통하여 차관자금으로 조달하였다. 그 결과 1995년 현재 전국의 저수지수는 1만 8161개소로 증가되었으며, 이를 관할하는 농지개량조합의 몽리면적은 51만 1,000㏊로 확대되었다.

우리나라의 쌀 자급은 단군 이래 계속 부족하여왔으나 저수지를 중심으로 한 이와 같은 수리사업의 결과로 1970년대 후반부터 비로소 쌀 자급을 달성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世宗實錄)』
『성종실록(成宗實錄)』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농림업주요통계』(농림부, 1997)
『한국농업기술사』(한국농업기술사발간위원회, 1983)
『농림수산고문헌비요』(김영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82)
『이조수리사연구』(이광린, 한국연구원,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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