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산 통도사
양산 통도사
불교
개념
승려와 재가신도가 모여 수행과 의례 등을 통해 불교의 교법을 구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사원 · 사찰 · 가람.
이칭
이칭
사원, 사찰, 가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절은 승려와 재가신도가 모여 수행과 의례 등을 통해 불교의 교법을 구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이다. 사원·사찰·가람이라고도 한다.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은 승려들은 원래 거주지가 없었으나 석가모니가 우기에 바깥 출입을 삼가는 규율을 정해 안거라는 공동생활을 하게 하면서 안거 장소로 절이 생겨났다. 시대가 흐르면서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 수행을 위한 도량, 교육·포교를 위한 전당으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 절은 조선시대 이후 주로 산지에 건립되었으며, 가람배치에서는 불전과 탑을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배치법이 골격을 이루었다.

정의
승려와 재가신도가 모여 수행과 의례 등을 통해 불교의 교법을 구현하는 장소를 가리키는 불교용어. 사원 · 사찰 · 가람.
개설

사원 · 사찰 · 가람(伽藍) 등이라고도 하며 우리말로는 절이라고 한다. 절[寺]의 어원은 상가람마(Sa○-ghā-rā-ma)로서, 교단을 구성하는 출가한 남자[比丘]와 출가한 여자[比丘尼]가 모여사는 곳이다. 이것을 한역(漢譯)하여 승가람마(僧伽藍摩)라 하였고, 줄여서 가람이라 표기하게 된 것이다.

성립과 발전

석가모니의 전도(傳道) 초기인 기원전 6세기 무렵의 인도 승려들은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정한 거주지가 없었다. 그들은 독신생활을 지키면서 걸식으로 수도생활을 영위하였다. 다른 종교의 수행자들과 마찬가지로 숲속의 동굴이나 큰 나무 아래서 좌선하거나 유행(遊行)을 통하여 불법을 전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도 기후의 특성 때문에 우기에는 이와 같은 생활이 불가능하게 되어, 외출보다는 한곳에 모여 정진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원시불전(原始佛典)에 속하는 『사분율 四分律』의 기록처럼, 장마철에 외출한 불교수행인들이 질퍽해진 땅 위에 나온 벌레를 밟아 죽이게 되는 경우가 있어, 불살생(不殺生)의 계율관으로 볼 때 문제가 되는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우기를 피하려는 실리적 이유에서뿐만 아니라, 교단이 비대해지는 데 따른 화합의 필요성이라는 이념적 이유에서 우기의 석달 동안 바깥 출입을 삼가는 것을 규율로 정하게 되었다.

이 여름 석달 동안 출가자들이 한곳에 모여 적절한 공동생활을 하는 것을 안거(安居)라고 한다. 인도의 경우는 여름철만 안거에 해당하지만 중국 · 한국 등 북방성 기후의 국가에는 겨울철에도 석달의 안거기한이 있다.

안거를 하게 될 때 가장 필요한 일은 규율을 정하는 것과 공동으로 생활할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다. 규율을 정하는 일은 부처님이 직접 제정하였지만 장소를 마련하는 일은 경제력 있는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해야만 하였다. 이에 불교신도들은 부처님과 승려들이 한곳에 모여 안거할 장소를 자발적으로 마련하게 된 것이다.

불교의 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집단거주의 장소는 죽림정사(竹林精舍)와, 수닷타(Sudatta)라는 장자(長者)가 온 산을 온통 금으로 덮어서 마련하였다는 일화가 전해 오는 기원정사(祈園精舍) 등이 있다.

이들 정사는 안거를 지내기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의하여 생긴 것으로, 불교교단의 공동재산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생겨난 당시의 절은 단순한 공동주거지의 성격을 띠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종교의례를 집행하는 성소(聖所)로서 그 성격이 승화되었다.

석가모니 당시의 불교의례였던 포살(布薩) · 자자(自恣) · 가치나(迦絺那) 등, 주로 자신의 허물을 대중 앞에서 참회하는 형식으로 된 이들 의례가 적어도 보름에 한 번씩 행하도록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모임의 근거지가 되었던 절은 규모나 숫자에서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대승불교가 일어나는 기원 전후에는 불탑(佛塔)의 건립이 유행하여 새로운 사찰기능을 갖게 된다. 특히 조형문화예술품 등 불교건축의 찬연한 전통을 이룩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절은 그 목적과 지역적 여건에 따라서 크게 세 가지 성격으로 나누어졌다. 첫째는 일반적인 의미의 절이다. 이는 정사라고도 하는데, 주로 승려들의 공동주거지와 법회의식의 집행처로 사용된다. 인도에서는 이것을 비하라(vihara)라고 한다.

둘째는 전루(殿樓)로서, 넓은 형식의 누각을 가리킨다. 이것은 특히 인도나 동남아시아 불교사원에 많은데, 12세기 후반에는 이슬람교의 영향으로 첨탑(尖塔)의 양식으로 변모하게 된다.

셋째는 굴원(窟院)으로서, 자연 또는 인공으로 석굴을 파고 수도하는 도량이다. 엄밀한 의미로는 이 가운데에서 정사와 굴원만이 불교사원의 효시가 된다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 전루는 정사에 포함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시대가 흐를수록 대건축군(大建築群), 조직화된 승원(僧院)으로 발전하게 되며, 인도의 나란다(Nālandā), 인도지나(지금의 캄푸치아)의 앙코르와트(AngKor Wat), 우리 나라의 총림(叢林) 등 대본산(大本山)이 그 대표적 실례가 될 수 있다.

석굴군(石窟群)으로 널리 알려진 곳은 아잔타(Ajanta) · 엘로라(Ell○ra) 등이 있으며, 그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전 3세기의 유지(遺址)도 있다. 이들 대규모의 석굴사원이 중국의 경우에는 운강(雲岡)석굴, 천룡산석굴 등으로 발전하였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석굴암이 그 대표적 예이다.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모여 사는 곳을 사원(寺院)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한(漢)나라 때 외국에서 온 사신들을 맞이하여 접대하고 머물게 하는 곳을 사(寺)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즉, 한나라 때 이역(異域)의 불교승려들이 처음 중국을 방문하였을 당시, 홍로사(鴻臚寺)라는 관청에 그들을 머물게 하였다. 이로 인하여 중국에서는 승려들이 머무는 곳을 ‘ㅇㅇ寺’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중국에 불교가 최초로 도입된 것은 후한(後漢)의 명제(明帝) 때인 67년이다. 가섭마(伽葉摩) · 축법란(竺法蘭) 등이 불상과 경문을 싣고 중인도에서 뤄양(洛陽)으로 들어오자, 명제는 크게 환영하여 뤄양성의 서옹문 밖에 정사를 지어 거주하게 하였다. 이 절의 이름을 백마사(白馬寺)라 하였다.

원래 사원이라 할 때의 ‘원(院)’은 회랑이나 담장을 둘러친 ‘원(園)’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당나라 때에는 ‘사(寺)’와 ‘원’을 같은 의미로 보았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사’를 ‘원’보다 넓은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즉, ‘사’는 절 전체를 가리키며, ‘원’은 ‘사’ 가운데에 있는 별사(別舍)의 뜻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암(庵)’은 흔히 산속에 있는 작은 집 · 토굴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어 왔다. 간혹 토굴 등 수행처를 수(藪)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절이라 부르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사원을 ‘절’이라 부르게 된 이유는 확실하지 않으나 몇 가지의 설이 있다. 신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해질 때, 아도(阿道)는 일선군(一善郡: 지금의 善山郡)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것이 우리말로는 ‘털레의 집’이 되어, 그 ‘털’이 ‘덜→절’로 바뀌었다는 설이 있다. 속설로는 절을 많이 하는 곳이라고 해서 ‘절’로 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다.

일본에서는 절을 ‘데라’라고 하는데, 팔리어(Pali語) 테라(Thera)에서 왔다는 설과 ‘털레의 집’에서 연유된 것이 일본으로 전해졌다고 보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테라는 장로(長老)를 뜻하기 때문에 큰스님이 머무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요약하면, 절은 불상과 당탑(堂塔)을 모시고 승려들이 거주하면서 불도를 수행하고 교법을 가르쳐 펴는 기능을 가진 집이다. 지역과 기후에 따라 그와 같은 기능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한 변형이 있을 뿐, 본질적인 면에서 정사 · 가람 · 사원 · 절은 모두 같은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의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절은 고구려에 불교가 도입된 이후 375년( 소수림왕 5)에 세워진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이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373년에 성문사(省門寺)와 이불란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음). 신라의 경우에는 아도가 선산지방에서 최초의 포교활동을 한 모례의 집을 들 수 있으나, 공식적인 최초의 절은 이차돈(異次頓)의 순교를 빚은 천경림(天鏡林)의 흥륜사(興輪寺)를 효시로 보고 있다.

이 흥륜사지는 오릉(五陵) 곁의 절터로 추정되었으나, 현재는 이곳이 영묘사(靈妙寺)이고, 영묘사 터가 흥륜사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다.

고대 우리나라의 절은 주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도시 중심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였다. 그러나 시대 상황과 사회적 여건에 따라 절에 따라서는 수행 또는 포교에 역점을 두는 특수성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에 의한 입지조건에 따라서 서로 다른 특징적 면모를 보이게 되었다. 기능별로 볼 때 우리 나라의 절은 대략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는 평지가람형(平地伽藍型)이다. 그것은 수도를 중심으로 하여 넓은 사역(寺域)에 걸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것이 보통이다. 특히, 왕실의 원당(願堂)이나 국찰(國刹) 등이 많고, 동시에 교통의 편리함 때문에 대중적 불교의 형성에도 큰 영향을 끼친다.

둘째는 심산유곡에 자리잡은 산지가람형(山地伽藍型)이다. 이것은 신라 말엽에 들어 온 선종(禪宗)의 영향과 풍수지리에 의거하여 주로 수행생활에 적합하도록 설계된 특징을 지녔다. 이와 같은 사원은 현재까지도 수도도량의 전통을 지켜오고 있다.

셋째는 천연이나 인공의 석굴에 사원을 건립하는 석굴가람형(石窟伽藍型)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암벽을 뚫어서 만들거나 석재로 지어서 거주장소나 법당을 세우게 되는데, 주로 기도도량의 기능을 지닌다.

그러나 이것은 입지조건에 따른 성격별 분류이고, 각각의 절은 모두 전문 수행인과 일반 수행인을 위한 기능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즉 그 사찰의 특성에 따라 참선 · 염불 · 간경(看經) · 기도 등 특정한 불교신행을 집전하는 곳이 된다.

우리나라 불교의 전문수행은 주로 현교(顯敎) · 밀교(密敎) · 참선(參禪) · 염불(念佛)의 네 가지로 분류되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의 절은 이 네 가지의 분류에 의하여 수행하는 전문도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교사찰은 주로 불교의 교리를 공부한다는 뜻으로서 강원(講院)을 갖추게 된다. 밀교사찰은 주문을 중심으로 수행하면서 만다라(曼茶羅)의 구조에 따라 독특한 불상 및 형태를 갖추며, 참선도량은 선원(禪院)을, 염불도량은 왕생극락(往生極樂)을 염하는 염불당을 갖추게 된다. 이 네 가지 외에도 청정한 몸과 마음을 가꾸는 율원(律院)을 갖춘 도량도 있다.

우리나라의 절 가운데에는 이와 같은 수행도량을 모두 갖춘 곳도 있고, 한두 가지만을 전문적으로 닦는 곳도 있다. 특히, 선원과 강원 · 율원을 모두 개설한 절을 총림(叢林)이라고 부르며, 대표적인 예로는 해인사 · 송광사 · 통도사 · 수덕사 등이 있다.

또 불교의 삼보(三寶: 佛 · 法 · 僧)를 사찰에 대비하여 비유하기도 한다.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는 점에서 불보(佛寶)사찰, 해인사는 팔만대장경판을 보존했다고 하여 법보(法寶)사찰, 송광사는 지눌(知訥) 이래 16국사를 배출했다고 하여 승보(僧寶) 사찰로 존숭받고 있다.

우리나라 절이 주로 산지가람형인 까닭은 몇 가지 사상적인 특색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는 한국인의 산악숭배 경향이다. 명산의 봉우리마다 불보살(佛菩薩)의 명호가 붙여지고 그곳을 골라 절터로 잡는 것은, 우리 고유의 산악숭배사상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다. 특히, 금강산 법기보살(法起菩薩)에 관한 신앙과 풍수지리 등 도참설(圖讖說)의 영향으로, 마침내 이 땅을 불국토(佛國土)라고 믿는 독특한 사상을 낳게 되는 것이다.

둘째로는 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의 의지를 들 수 있다. 즉, 일본과 경계선이었던 동래에 범어사를 세우고 토함산에 불국사와 석불사(石佛寺, 현재 석굴암)를 창건한 것이나,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 태백산 등에 절을 건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佛力)으로 승화되는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 있다.

셋째는 초세속주의(超世俗主義)의 경향 때문이다. 즉, 불법을 세속의 계도(啓導)라는 입장에서 받아 들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탈속의 경지가 존중되었고, 나아가서는 자연주의적 고대 불교의 인간관이 절을 자연과의 조화라는 관점에서 산속에 건립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당우 및 가람 배치

당우

절은 수도하는 곳, 즉 불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을 올바로 수립하며 그 진리를 널리 선양하고 구현하는 곳이다. 따라서 절은 수행과 교육과 포교의 세 가지 기능을 발전시켜 왔다.

이 세 기능을 보다 훌륭하게 충족시키기 위해서 절에는 예배의 대상인 불상이나 당탑이 가장 핵심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불교의 발전과 함께 여러 종파가 생겨나고 그들이 의거하는 경전 · 교리 등에 차이가 남에 따라, 예배의 대상인 주존불(主尊佛)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불상이 조성된 것은 간다라예술이 발전하는 기원전 3세기 이후이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4세기경에 처음 불상이 출현한다. 예컨대, 화엄종 사원에서는 비로자나불과 대적광전(大寂光殿), 정토종에서는 아미타불과 극락전, 천태종에서는 석가모니불과 대웅전 등의 건립 조성이 필수적인 것이 된다.

이와 같이 각기 다른 건축물을 갖추지만 그 기본에서는 우리 나라 절의 구성을 흔히 칠당가람(七堂伽藍)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칠당가람은 불전 · 강당 · 승당 · 주고 · 욕실 · 동사 · 산문의 일곱 가지이다.

① 불전(佛殿): 본존불(本尊佛) 및 보살 · 호법신중(護法神衆) 등을 봉안하는 사원의 중심 건물이다. 인도에서는 부처님을 금빛 나는 분이라는 뜻에서 금인(金人)이라고 하는데, 거기에서 파생되어 부처님을 모신 집을 금당(金堂)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절에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많은 불전들이 있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불전이다. 대광명전(大光明殿)은 비로전(毘盧殿) 또는 대적광전이라고도 하는데, 본존불로는 비로자나불을, 삼신불(三身佛)을 봉안할 경우에는 노사나불(盧舍那佛)이나 석가모니불을 함께 모신다. 극락전은 미타전(彌陀殿) 또는 무량수전(無量壽殿)이라고도 하며 아미타불을 모신다.

미륵전(彌勒殿)은 용화전(龍華殿)이라고도 하는데, 미래불인 미륵불 또는 미륵보살을 모신다. 약사전(藥師殿)은 약사여래를 봉안하며, 팔상전(八相殿)은 부처님의 일생을 팔상으로 묘사한 그림이나 조각을, 응진전(應眞殿)은 부처님의 제자들인 십육나한(十六羅漢)을, 나한전(羅漢殿)은 부처님의 오백제자인 오백나한을 모신다.

관세음보살을 절의 주존불로 모실 때에는 원통전(圓通殿)이라 하며, 부속되는 불전 속에 관세음보살을 모실 때에는 보통 관음전이라 한다. 문수전(文殊殿)은 지혜 제일의 문수보살을 모시고,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과 지옥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의 그림을 모신 전각이다.

칠성각(七星閣)은 북두칠성을, 산신각(山神閣)은 토속적인 산신을 호랑이와 함께 그려서 모시며, 독성각(獨聖閣)은 말세 중생에게 복을 베푸는 나반존자를 봉안하게 된다. 산신각이나 칠성각은 불교신앙과는 직접 관련이 없지만, 이들 도교(道敎)신앙이 불교로 흡수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는 면에서 흥미로운 배치이다.

② 강당(講堂): 설법이나 법요의식(法要儀式) 등을 행하는 당우(堂宇)로서, 조선시대 선종에서는 법당(法堂)이라고 불렀다. 인도에서는 이 강당과 포살당(布薩堂)을 구분하여 지었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특별히 별도의 건물을 짓지는 않았다. 다만, 강당 등에서 이와 같은 포살의식을 집행할 때에는 그 건물을 설계당(說戒堂)이라고 불렀다.

③ 승당(僧堂): 승려들이 좌선, 정진하는 곳이다. 후에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곳인 승방(僧房)과 구별하기 위해서 참선하는 방이나 집을 선방(禪房)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④ 주고(廚庫): 공양(供養)을 마련하는 부엌과 창고 등 절의 살림을 경영하는 곳이며, 후원(後院)이라고도 한다. ⑤ 욕실: 목욕하는 곳이다. ⑥ 동사(東司): 측옥(厠屋) 혹은 해우소(解憂所)라고도 하는 변소이다.

⑦ 산문(山門): 사원의 입구에 있는 문으로서, 총문(總門) 또는 삼문(三門)이라고도 한다. 삼문이란 절 경계문인 산문, 큰문인 대문, 예배장소로 들어가는 중문의 셋을 가리킨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체로 일주문(一柱門) · 천왕문(天王門) · 불이문(不二門) 또는 문루(門樓)의 순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밖에도 불경을 보관하는 장소로 경장(經藏)이라고도 하는 장경각(藏經閣)과, 불교의식의 기본 법구인 종 · 북 · 운판(雲板) · 목어(木魚)를 봉안하는 종각(鐘閣) 또는 고각(鼓閣)이 있다.

그리고 그 절과 인연이 있는 고승석덕(高僧碩德)들의 초상화를 봉안하는 영각(影閣)이 있는데, 따로 지을 때도 있고 고승이 거처하였던 방을 영각으로 삼는 경우도 있다. 또, 여러 승려들의 초상화를 함께 모시기도 하는데, 이 경우에는 주로 조사당(祖師堂)이라 한다.

칠당의 배치는 대체로 북쪽에서부터 남쪽에 이르며, 이러한 직선의 배열은 주로 인체에 결부시켜 생각하는 전통적 관습도 있다.

가람 배치

절에서 가장 중요한 구조물은 당우와 탑이다. 특히, 탑은 불상보다도 건립시기가 빠른 것으로서, 인도에서는 이미 서기전 2세기부터 건립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불교 도입 초기부터 탑 건립이 성행하였다.

그러나 신라 말부터 특히 산지가람에서는 간혹 탑을 조성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으며, 고려 이후 조선시대에는 드물기는 하나 탑이 절의 외곽지대로 밀려가거나 건립되지 않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일반 절에서 탑과 불전은 가장 기본적인 구조물이므로, 우리나라의 가람 배치를 논할 때에는 탑의 배치 형식에 기준을 두고 있다. 즉, 탑이 불전과 일직선상에 놓여 있으면 일탑식(一塔式) 가람 배치, 두 탑이 불전 앞 동서로 대칭하여 세워지면 쌍탑식 가람 배치, 탑이 하나에 금당이 셋일 경우에는 일탑삼금당식(一塔三金堂式) 가람 배치라 한다. 이는 탑과 불전 중 어느 쪽에 더 비중을 두느냐 하는 차이점에서 생겨난 가람 배치이다.

탑이 예배의 주 대상이 될 때에는 일탑식으로 배치하였고, 불상이 주된 예배대상으로 될 때에는 쌍탑식 가람 배치를 취하였다. 우리나라의 사원은 불전 중심으로 된 가람 배치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사리신앙(舍利信仰)이 열렬하였기 때문에 탑에 대한 숭배도 매우 컸다. 따라서, 양자를 동시에 숭배하는 가람 배치법이 우리 나라 가람 배치의 골격을 이루면서 발전되어 왔다.

가람 배치는 크게 나누어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탑원(塔院) · 금당원(金堂院) · 승원 등이 함께 있는 복합형식과 탑이 있는 예배원(禮拜院)과 승원의 복합형식, 그리고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형식이다.

첫째, 탑원 · 금당원 · 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탑을 모신 지역과 불상을 모신 곳, 승려들이 거주하는 지역 등이 담장에 의해서 엄격하게 나누어진 형태를 가리킨다. 이른바 일탑가람식으로서 탑과 금당을 병립시키는 형식이다. 따라서, 사상적으로는 탑신앙과 불상신앙이 동등한 비중으로 생각되는 가람의 경영 형태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경주암곡(暗谷)의 고선사지(高仙寺址)가 대표적인 예로서, 삼층석탑을 해체 이전할 때에 사리함과 불상 등이 발견된 바 있다. 보문단지 조성으로 그 절터는 수몰되었고 삼층석탑은 경주박물관으로 이전되었다.

사리의 발굴 결과 이곳에는 탑원 · 금당원 · 승원 등이 엄격히 분리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삼국 통일 이전에 이와 같은 양식이 유행하였을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경주낭산(狼山)의 황복사지(皇福寺址)도 이와 같은 유형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둘째, 탑이 있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탑과 금당, 또는 탑과 금당 · 강당 등이 회랑(廻廊)으로 둘러싸인 예배원과 기타 부속건물이 있는 승원으로 나누어진 배치 형식이다. 그러나 예배원 안에도 탑과 불적이 여럿 있는 경우와 하나씩만 있는 경우 등 다양한 가람 배치가 있다. 일탑일금당의 형식은 문경 봉암사(鳳巖寺), 이탑일금당은 불국사가 대표적인 예이다.

또한, 일탑다불전(一塔多佛殿)은 한 예배원 안에 불전이 여럿 있는 경우로서, 경주황룡사지(皇龍寺址)가 가장 대표적인 배치이다. 이 밖에도 이탑다불전과 다탑다불전 등의 유형이 있는데, 전자의 경우로는 익산미륵사지(彌勒寺址), 후자의 경우로는 보령성주사지(聖住寺址) 등이 있다.

이와 같이, 예배원 안에 여러 건물들이 복합적으로 배치될 때에는 금당과 탑이 주로 관음전 · 비로전 · 영산전 등의 독립된 불전들과 복합형식을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이들 예배원은 중문을 중앙에 두고 좌우로 종루(鐘樓)와 고루(鼓樓) · 탑 · 석등(石燈) · 금당 · 강당 등을 입지조건에 맞게 배치하며, 이들을 연결하는 회랑을 두르는 것이 일반적으로 지켜져 온 배치 원칙이다. 이것은 신라시대까지 그대로 지켜 온 신라 가람의 전형이다.

그러나 고려 이후 특히 조선시대에 들어서면서 산지사원(山地寺院)의 건립이 성행하게 되어 변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인왕문 · 천왕문 등을 배치하고, 탑과 주불전을 중심으로 하여 누각이나 기타 건물들을 그 둘레에 배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평지사원의 경우에도 중앙의 핵심 건물과 탑 이외에는 많은 불전들을 나누어서 건립하는 경우가 많았다. 때에 따라서는 이 불전들을 각기의 군(群)으로 묶어서 관리하기도 하는데, 통도사와 같은 경우가 대표적 실례이다. 통도사는 이를 세 단으로 나누어 각각 상로전(上爐殿) · 중로전(中爐殿) · 하로전(下爐殿)이라고 한다.

셋째, 탑이 없는 예배원과 승원의 복합 배치형식은 고려시대까지는 거의 발견할 수가 없다. 조선시대부터 탑 없는 사원의 건립도 있었는데, 이것은 둘째 방식에서 탑을 없앤 배치형식을 가리킨다. 이와 같은 경우에는 예배원 안에 다양한 불전이 있어서 예배소의 구실을 하게 된다.

이와 같은 유형 외에도 매우 복잡하고 다양한 가람 배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절이지만, 기본 배치는 이 세 가지 유형에서 파생되어 조금씩 변형시키거나 편의에 맞게 개조한 것이 대부분이다.

건축재료

불교건축물은 시대나 지역, 창건주의 기호 등에 따라 각기 다른 재료를 쓰고 있으며, 건물의 비중에 따라서도 재료의 선택이 달라진다. 대개 절의 건축물을 구성하는 기본 재료로서는 풀[草] · 벽돌 · 기와 · 나무 · 돌 · 금속 등이 있다. 초가[草屋]는 풀을 엮어 벽면을 만들고, 지붕에도 풀을 엮어 이는 형식을 취한다. 인도에서는 특히 하안거(夏安居) 때 애용되었으며,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깊은 산속에서 홀로 수행하는 수도자들에게 보편적으로 행해졌다.

나무집[木屋]은 신라시대에 유행했던 것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대부분의 사찰건축물의 중심 재료가 되고 있다. 열대지방에서는 통나무를 엮어서 짓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나라의 경우에는 나무를 잘라서 판잣집으로 짓는 경우가 많다. 소나무가 주종이지만, 간혹 잣나무 등을 목재로 쓰는 경우도 있다.

벽돌집[塼瓦室]은 중국 사원에서 유행한 수법이며, 우리나라에도 이와 같은 유형이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전탑(塼塔)이 유행하였던 시기가 있었던 만큼 벽돌로 지은 사원이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돌집[石室]은 자연의 석굴사원과, 돌로 집을 짜는 경우가 있다. 우리나라의 석질은 단단한 화강암 계통이 많기 때문에 인공적인 석굴보다는 자연동굴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석굴암은 돌을 짜서 집을 지은 대표적 실례이다.

또, 돌로 벽을 쌓고 지붕은 목조로 구축한 것도 있었다. 자연 석실을 이용한 경우로는 단석산(斷石山)이 있고, 인공의 경우는 고려시대의 것으로서 중원(中原)의 미륵당석굴(彌勒堂石窟)이 있다.

흙집[土屋]은 땅굴모양의 움막이나 흙으로 담벽을 만들고 지붕을 이은 것 등이 있다. 큰 절에서보다는 임시로 사용한 암자 등에서 많이 볼 수 있다.

사원 생활

절에는 필연적으로 상주대중(常住大衆)과 내집대중(來集大衆)이 있다. 우리나라 절의 큰방에는 이들 상호간의 질서를 지키기 위하여 구분을 두는 것이 상례였다. 즉, 불상을 중심으로 하여 동쪽(왼쪽)은 청산(靑山)이라 하고 그 반대편을 백운(白雲)이라 한다. 청산에는 그 절에 상주하는 승려들이 자리를 잡고, 백운에는 수시로 모였다 흩어지는 방문객들이 자리를 잡게 된다.

사원생활은 그 자체가 수도의 표상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단위에서부터 대중들이 함께 하는 행사에 이르기까지 일정한 규율과 질서가 있다. 따라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는 행위 등이 금지됨은 물론이며, 철저한 정숙이 요구된다.

승려로 입문한 이들이 통과해야 하는 첫번째 관문은 행자(行者) 교육이다. 1년 동안 불교의 기본교리 · 의례 · 기초경전 등을 공부하며, 그 이후 구족계(具足戒)를 받아 정식으로 승려생활에 입문하게 된다.

절에 있는 이들은 대략 맡은바 소임이 있는데, 행정 책임자를 주지(住持)라고 한다. 그 밑에 총무 · 교무 · 재무 등 삼직(三職)의 책임자를 두는 것이 통례이다. 절의 성격에 따라 선원인 경우에는 조실(祖室), 강원인 경우에는 강주(講主) · 회주(會主)가 있다.

절의 살림살이를 맡은 이를 원주(院主)라 하고, 그 밑에 허드렛일을 맡은 이로서 공양주(供養主: 공양을 준비하는 승려) · 부목(負木: 나무를 하고 불을 때는 승려) · 채공(菜供: 반찬을 만드는 승려) 등이 있다.

우리나라 스님은 어느 절에 가든지 방부(榜付: 본인의 이름과 약력을 적은 기록표)를 드림으로써 그 절에 입실한 예의로 삼는다. 방부는 그 절의 행정 책임자나 상징적 책임자에게 드리는 것이 원칙이다.

방(榜)은 용상방(龍象榜)을 가리키며, 용상방 내의 한 소임을 맡음으로써 절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다. 각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 생활을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누구나 지켜야 할 것은 불제자로서의 신행 표현이다.

하루 일과 가운데 새벽 3시30분, 오후 6시 30분의 조석예불(朝夕禮佛), 법당에서의 헌향(獻香), 오전 11시에 행하는 마지의식(摩旨儀式:불전에 밥을 지어 올림)의 헌공(獻供), 그리고 예참(禮懺:참회의식) 등은 공동의 수행이다.

특히, 백장청규(百丈淸規: 중국의 백장이 지은 규칙)로서 이어오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一日不食).’라는 철칙을 잘 준수하고 있다. 그 밖에 운력(運力)이라 하여, 절의 큰 일이나 산림 가꾸기 등에는 그 절에 거주하는 모든 승려들이 참석하는 것이 상례이다.

사원생활의 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물론 행정 책임자인 주지나 상징적 대표격인 조실(祖室)이 집행하지만, 그 이외의 중요한 논의는 대중들이 함께 모인 대중공사(大衆公事)를 통하여 결정하고 집행한다. 특히, 절 내에 있는 강원 · 선원 등의 교육기관은 엄한 규율 아래에서 생활이 전개된다. 절의 기능 가운데 가장 핵심적인 일은 수도이며, 그를 위한 승려의 교육은 필수적인 관건이 된다.

강원은 사미과(沙彌科) · 사집과(四集科) · 사교과(四敎科) · 대교과(大敎科)를 기본 과정으로 삼고 있는데, 수료연한은 5년이 걸린다.

대교과까지 이수한 승려들은 수의과(隨意科)를 개설할 수 있다. 일반 승려들과 함께 강원의 학인(學人)들은 새벽 3시에 기상하여 4시에 예불, 6시에 조공(朝供), 7시부터 11시까지 오전 강의,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오후 강의를 받고, 저녁 9시에 취침한다.

선원의 수행은 안거의 시기에 행하는 것이 상례이다. 예불이 생략되면 다만 삼배(三拜) 드리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전 오후의 일과시간에는 주로 참선에 몰두하는데, 50분 좌선, 10분 경행(經行)을 하루 10시간 이상 계속한다. 전통적인 우리나라의 선원은 간화(看話: 話頭를 가지고 참선하는 방법)에 의존하며, 선방의 규율을 담당하는 이를 입승(立繩)이라고 한다.

현황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사원의 운영은 오교구산(五敎九山) 혹은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체제로 유지되어 왔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을 반포함으로써 31본산제도(本山制度)를 확립하였다. 이 제도는 우리나라의 절을 지역별로 나누고, 그 각 본산 밑에 말사(末寺)를 두어 본산에서 말사들을 관장하는 제도였다. 말사로 등록된 당시의 사찰은 1,384개소였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불교종단은 비구 · 대처(帶妻) 승단 간의 분쟁과 여러 신흥 불교종단의 출현으로 본산제도가 사실상 사원을 관장할 수 없게 되었다. 1962년 4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이 통합종단으로 출범하게 되면서 북한에 있는 사찰을 제외하고 25본산제도를 확립하였다. 행정적으로는 총무원(總務院)이 불교사업을 관장하며, 그 밑에 각급 본산이 자율로 사업을 관장하게 된 것이다.

25본사는 ①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 ② 용주사(龍珠寺), ③ 신흥사(神興寺), ④ 월정사(月精寺), ⑤ 법주사(法住寺), ⑥ 마곡사(麻谷寺), ⑦ 수덕사(修德寺), ⑧ 직지사(直指寺), ⑨ 동화사(桐華寺), ⑩ 은해사(銀海寺), ⑪ 불국사(佛國寺), ⑫ 해인사(海印寺), ⑬ 쌍계사(雙磎寺), ⑭ 범어사(梵魚寺), ⑮ 통도사(通度寺), (16)고운사(孤雲寺), (17)금산사(金山寺), (18)백양사(白羊寺), (19)화엄사(華嚴寺), (20)선암사(仙巖寺), ㉑ 송광사(松廣寺), ㉒ 대흥사(大興寺), ㉓ 관음사(觀音寺), ㉔ 선운사(禪雲寺), ㉕ 봉선사(奉先寺)이다.

이 25본사에는 1,068개의 말사가 소속되어 있고, 각 사암(寺庵)에는 신도회(信徒會)가 조직되어 있다. 그들 신도단체의 횡적 연계를 맡은 본부가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이다.

최대 종단인 조계종 이외의 종단으로는 천태종 · 태고종 · 진각종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우리나라 불교의 해외포교는 1965년 이후 꾸준한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에 설치된 재일 홍법원(在日弘法院)을 비롯하여 1971년 홍콩에 홍콩 홍법원이 건립되었으며, 미국 펜실베이니아의 혜능사(惠能寺), 캘리포니아의 조계선당(曹溪禪堂), 버지니아의 일붕선원(一鵬禪院), 캐나다의 홍법원 등이 있다.

1974년에는 네팔 정부가 추진하는 룸비니(Lumbini)개발사업에 참여하여, 부처님의 성지(聖地)에 우리나라 사원을 건립할 계획을 추진중에 있다.

1982년에는 대만에 한국 홍법원을 건립함으로써, 현재 우리나라의 해외 홍법원은 미국 · 캐나다 · 일본 · 독일 · 스위스 · 프랑스 · 동남아시아 · 남미 등 12개국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정병조, 대원정사, 1992)
『한국불교의 현황과 문제』(정병조, 서울대학교 종교학세미나, 1982)
『한국의 사찰』 1∼17(한국불교연구원, 일지사, 1974∼1979)
『한국건축양식』(정인국, 일지사, 1972)
『한국미술문화사논총』(고유섭, 통문관, 1966)
『조선불교통사』(이능화, 신문관, 1918)
「한국의 불교미술」(황수영,『현대불교신서론』13,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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