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주(光州). 출신지는 장택현(長澤縣: 지금의 전라남도 장흥)이다.
공민왕이 세자 때 함께 원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왕으로 즉위하자 호종한 공으로 1등 공신이 되어 김용(金鏞)과 더불어 총애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원나라가 고우(高郵)에 진을 치고 있던 장사성(張士誠)을 토벌하기 위해 사신을 보내어 정세운을 비롯한 여러 장수와 서경의 수군 300명, 또 날쌔고 용감한 병사들을 징발해 8월 10일을 기한으로 연경(燕京)에 모여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지원하였다.
1359년 기철(奇轍)을 주살해 사직을 안보한 공으로 남양후(南陽侯) 홍언박(洪彦博), 참정상의(參政商議) 경천흥(慶千興)과 함께 1등 공신이 되었다. 그 해 11월 압록강이 언 것을 이용해 홍건적이 공격해 들어오자 다음 해 정월에 서북면도순찰사로 임명되어 이에 대비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군사 10여만 명을 이끌고 다시 공격해오자, 서북면군용체찰사(西北面軍容體察使)에 임명되어 절령(岊嶺: 자비령)의 성책을 지켰다. 그러나 성책이 무너지자 곧 왕을 호종해 복주(福州: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행하였다.
성품이 충성스럽고 청백해, 밤낮으로 울분을 참지 못하고 적을 소탕할 것을 스스로 맹세하였다. 왕에게 빨리 조서를 내려 민심을 위로하고 제도(諸道)의 군사를 징발해 적을 칠 것을 주청(奏請)하였다. 이에 왕은 정세운을 총병관으로 임명해 절월(節鉞: 생산권을 상징하는 수기와 도끼)을 주어 모든 군사를 총독하게 하였다.
이 때 홍건적은 개경을 함락시키고 이 곳을 본거지로 삼아 각지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에 1362년 정월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황상(黃裳)·한방신(韓方信)·이여경(李餘慶)·김득배(金得培)·안우경(安遇慶)·이구수(李龜壽)·최영(崔瑩) 등 여러 장수와 함께 군사 20여만 명을 거느리고 나갔다. 개경(開京)을 포위하고 공격을 가해 적들을 압록강 밖으로 몰아내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세운의 공을 시기한 김용이 왕의 뜻을 거짓으로 꾸미고, 안우·이방실·김득배를 비밀히 꾀어 정세운를 살해하였다. 그 뒤 왕이 정세운를 살해한 죄를 논핵했고, 첨의정승(僉議政丞)을 추증해 장사를 지냈다.
홍건적을 피해 복주로 피난했을 때 호종한 공과 경성을 수복한 공을 추록해 1등 공신으로 벽상도형(壁上圖形)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