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9년(공민왕 8) 홍건적(紅巾賊)의 침입 때 안우(安祐) 등과 함께 적을 격퇴하였고, 1361년 홍건적의 재침입 때에도 개경을 탈환하고 적을 평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1363년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있을 때 권신(權臣) 김용(金鏞)이 일당 50여 명을 데리고 행궁(行宮)인 흥왕사(興王寺)에 침입하여 공민왕(恭愍王)을 죽이려던 사건이 일어나자 밀직사(密直使) 최영(崔瑩) 등과 함께 난을 진압하여 역시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이어 왜적방어사(倭賊防禦使)·서북면도지휘사(西北面都指揮使)를 거쳐 1359년 1차 홍건적의 난에 적을 격퇴시킨 공으로 1등공신에 책봉되었다. 다음해 원나라에서 덕흥군(德興君: 충선왕의 셋째 아들)을 왕으로 삼고 기삼보노(奇三寶奴)를 세자(世子)로 삼아 쳐들어온 최유(崔濡)가 원나라의 1만 군사와 함께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하자 도지휘사(都指揮使)로 싸워 물리쳤고, 이성계(李成桂) 등의 지원을 얻어 적을 모조리 소탕하여 압록강 밖으로 몰아냈다.
1365년 재차 침입하여온 홍건적을 평정한 공으로 광문감승(廣文監丞)에 제수(除授)되고, 이어 찬성사(贊成事)에 임명되었다. 4월 왜구가 강화 교동(喬桐)에 침입하여 동강(東江)과 서강(西江)에 이르자 찬성사로서 적을 방어하였다. 1367년 삼사우사(三司右使)로서 경천흥(慶千興) 등과 신돈(辛旽)의 제거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남원에 장류(杖流)되고 처자는 노비가 되었으며 가산(家産)은 몰수당했다.
신돈이 죽은 뒤 1371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가 되었으며, 나아가 서경도만호(西京都萬戶)로서 오로산성(五老山城)을 쳐서 함락시키고 원나라의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합랄불화(哈刺不花)를 사로잡고 돌아왔다. 뒤에 평리(評理)를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