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여는 해방 이후 「지리산조운도」·「위창선생팔십오세상」·「독수리」 등을 그린 화가이다. 1934년 일본 남화의 대가인 야노교손(失野橋村)을 스승으로 삼고자 오사카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졸업 후 일본과 서울을 왕래하며 청전화숙에서 이상범으로부터 사사했다. 1936년 조선미술전람회에 「추교」가 입선, 본격적인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는 화풍의 형성기로, 국내 산천을 사생하며 그린 향토경을 일본 근대의 남화적 필치로 담아냈다. 1950년 월북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한 작품으로 북한 미술계의 ‘전후 1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14년 경상남도 거창에서 출생했다. 호는 청계(靑谿)이며, 1924년 거창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9년 졸업했다. 졸업 후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잡화상점과 개인병원에서 심부름을 하는 등 어린 나이에 집을 나와 생활했다.
합천 해인사 주지 스님의 도움으로 도쿄 유학을 떠나 다이헤이요미술학교〔太平洋美術學校〕 야간부에 잠시 다녔다. 그러나 1934년 일본 남화의 대가인 야노교손〔失野橋村, 1890~1965〕을 스승으로 삼고자 그가 교장으로 있던 오사카미술학교〔大阪美術學校〕에 입학해 1939년까지 전공과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같은 학교 연구과에 들어가 1942년에 졸업했다. 그 사이 서울을 왕래하며 청전화숙에서 이상범으로부터 사사했고, 1941년과 1942년에는 ‘청전화숙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1935년 제14회 서화협회전에 「적취(滴翠)」로 이름을 알린 후, 1936년 제15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추교(秋郊)」가 입선되면서 본격적으로 화단 활동을 시작했다. 1938년부터 1944년까지 한해도 거르지 않고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과 특선을 거듭했는데, 1939년 제18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삼월(三月)의 눈(雪)」으로 창덕궁상을 수상했으며, 1940년 제19회 때는 「석굴암의 아침」으로 무감사 특선을 수상했다.
1936년부터 1941년까지는 화풍의 형성기로, 국내 산천을 사생하며 그린 향토경을 일본 근대의 남화적 필치로 담아내던 시기이다. 1942년 오사카미술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정형화된 산수양식에 사생풍을 가미하여 화면 구성에 다양한 변화를 시도했하여, 이 시기 산수화는 남종화의 필묵미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이 강하다.
일제강점 말기인 1943년과 1944년 조선미술전람회에 각각 출품한 「호국금강공명왕」과 「운송선을 기다리다」와, 1944년 결전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차지한 「상재전장(常在戰場)」같은 작품들은 전시 체제의 시국을 반영한 것이다.
해방 이후 서울 성신여자중학교, 배재중학교, 부산 대광중학교 등에 재직했다. 그리고 1946년에 조선조형예술동맹, 1947년에는 조선미술동맹 동양화부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에 ‘동양화 7인전’에 출품하는 한편 동화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49년에도 서울과 부산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던 중 1950년 9‧28 수복 직전에 월북했다. 이 시기 제작한 작품으로는 「지리산조운도(智異山朝雲圖)」8첩병풍(1948), 「위창선생팔십오세상(葦滄先生八十五歲像)」(1948,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독수리」6첩병풍(1948, 연세대학교박물관 소장) 등이 남아있다. 이 작품들을 통해 산수, 인물, 화조 등 다양한 화목을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월북 이후 1952년 2월까지 미술제작소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미술작품들을 제작했다. 1952년 3월부터 조선미술가동맹 현역 미술가로 있었으며, 1954년 1월부터 평양미술대학 조선화강좌 교원, 강좌장으로 10년간 제자들을 양성했다. 이후 『채색화에 대하여』 · 『묵화에 대하여』 · 『조선화 기법』 · 『조선화 재료에 대한 사용법』 등의 집필활동을 통해 조선화의 이론적 체계를 다져나갔다.
조선화의 대표적인 작품인 「5월의 농촌」(1956, 국가미술전람회 1등상)은 공필(工筆)로 그린 채색화로, 북한 조선화 발전에 기여했다. 농민과 노동자들을 혁명의 이상적 영웅상으로 형상화한 「고성인민들의 전선원호(戰線援護)」(1958, 국가미술전람회 1등상)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구현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북한 미술계의 ‘전후 1세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4년에는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동맹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78년 이후 동맹현역미술가로, 만수대창작사 조선화단 미술가로 있으면서 많은 화조화를 제작했다. 미술 교육에서 이룩한 공로로 1962년에 부교수의 학직을 수여받았고, 미술창작의 공로로 1974년에 공훈예술가, 1982년에 인민예술가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1984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