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5년(숙종 11) 장릉(莊陵: 단종의 능)을 개수하면서 감사 홍만종(洪萬鍾)과 군수 조이한(趙爾翰)이 도내에 통문을 돌려 기금을 모아,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 박팽년(朴彭年) · 성삼문(成三問) · 이개(李塏) · 유성원(柳誠源) · 하위지(河緯地) · 유응부(兪應孚) 등 사육신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사우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9년(숙종 25) ‘창절(彰節)’이라 사액되어 서원으로서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791년(정조 15)에는 단종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낸 호장 엄흥도(嚴興道)와 금성대군(錦城大君)을 추가 배향하고, 그 뒤 화의군(和義君)을 추가 배향하였다.
경내에는 김시습(金時習) · 남효온(南孝溫) · 이맹전(李孟專) · 원호(元昊) · 조려(趙旅) · 성담수(成聃壽) · 권절(權節) 등의 생육신 위패를 아울러 모시고 있었다. 1741년(영조 17) 왕명으로 서원을 훼철하고, 위패는 매립한 뒤 유적지만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1868년(고종 5)경 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일제강점기 때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창절사(彰節祠) · 강당 · 동재(東齋) · 서재(西齋) 등이 있다.
사우에는 박팽년 · 성삼문 · 이개 · 유성원 · 하위지 · 유응부 등 사육신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매년 봄 ·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창절사는 1971년 강원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