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인천(仁川). 초명은 김수동(金壽童)의 이름을 딴 수동(壽童)이다. 자는 효중(孝仲). 호는 졸옹(拙翁). 채윤(蔡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남양부사 채신보(蔡申保)이고, 아버지는 정국공신(靖國功臣) 지중추부사 채수(蔡壽)이며, 어머니는 권이순(權以順)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진사가 되고, 1506년 별시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1511년(중종 6) 정언이 되었다. 1520년 홍문관부응교와 장령을 거쳐 사간·사헌부집의·홍문관 전한과 시독관(侍讀官)·동부승지가 되고, 1523년 좌부승지에서 승지가 되었다.
다음해 대사간에서 홍문관부제학이 되어 시폐오조(時弊五條)를 상소, 정령의 잦은 변개에 따른 폐단과 사족(士族)의 전가사변(全家徙邊)의 옳지 않음과 정신이 어둡고 쇠약하여 늙고 병든 자가 감(監)·시(寺)에 시위소찬(尸位素餐)하고 있음을 개탄하고, 사기(士氣)의 추향이 날로 낮아져서 문예(文藝)를 버리고 무거(武擧)에 나아가는 자가 점차 늘어나고 있으며, 향위(鄕圍: 鄕試의 試場)에서의 시험부정의 속출을 지적하였다.
1528년 청주목사가 되고, 1531년 경기도관찰사, 1533년 대사헌·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다음해 한성부좌윤·형조참판이 되었으며, 1535년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김안로(金安老)의 처남이나 평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으므로 김안로가 정유삼흉(丁酉三兇)으로 몰렸을 때 홀로 큰 화를 입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