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2년(고종 19) 6월 고려는 몽골에 대항하기 위하여 강화천도(江華遷都)를 단행하였다.
그러자 그 해 몽골의 장수 사르타이가 고려의 북계(北界: 지금의 평안도 지방)에 침입하여 서경의 반적(叛賊) 홍복원(洪福源)과 합세하여 고려를 위협하였다. 사르타이는 고려가 해도(海島)인 강화로 도읍을 옮긴 것을 꾸짖고, 국왕이 육지로 나올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에 사르타이는 북계에서 남쪽으로 개경을 거쳐 한양산성을 함락하고, 수주(水州: 지금의 경기도 수원)에 예속되었던 처인부곡(處仁部曲: 지금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아곡리)의 소성(小城), 즉 처인성에 도달하였다.
몽골의 제2차 침입 때 난을 피하여 처인성에 와 있던 백현원(白峴院)의 승려 김윤후가 활을 쏘아 사르타이를 죽였다. 그래서 장수를 잃은 몽골군은 전의를 상실하여 부장 철가(鐵哥)의 인솔로 곧 북으로 철수하였다. 처인성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승려 한 사람의 영도에 의하여 몽골군을 삽시간에 무너뜨려 물러가게 한 것은 큰 승리였다.
처인성전투의 승리로 몽골군은 더 이상 남하하지 못하고, 남쪽지방은 전쟁의 피해를 줄이게 되었다. 처인성승첩의 결과, 처인부곡은 처인현(處仁縣)으로 승격되었고, 김윤후는 상장군(上將軍)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사양하여 섭랑장(攝郎將)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