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관우 ()

천관우
천관우
고대사
인물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역사학자.
이칭
이칭
후석(後石)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5년
사망 연도
1991년 1월
본관
영양(穎陽)
출생지
충청북도 제천시
내용 요약

천관우는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으로 역사학자이다. 1925년에 태어나 1991년에 사망했다. 1944년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한국사를 전공하였다. 1951년 대한통신 기자로 언론계에서 활동하기 시작하여 한국일보와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편집국장과 주필 등을 역임하였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와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의 공동대표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유신체제하에서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여 고조선과 삼한, 가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 연구에 기여하였다.

정의
해방 이후 조선일보 논설위원, 동아일보 주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부회장 등을 역임한 언론인. 역사학자.
개설

본관은 영양(穎陽)이고 호는 후석(後石)이다. 1925년 충청북도 제천에서 출생하였다. 반독재·민주화운동을 전개했던 한국의 대표적인 언론인이자 한 평생을 한국고대사 연구에 바친 민족주의 계열의 역사학자였다.

생애 / 활동사항

1937년 청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으며, 1944년 경성제대 예과 문과을유(인문계)에 입학하였다. 예과를 거쳐 이듬해 학부에 진입하면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이병도를 비롯한 손진태·이인영·유홍렬 등에게 직접 지도를 받았다. 1949년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사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초 한국사연구에 뜻을 두어 대학졸업논문으로 「반계유형원연구(磻溪柳馨遠硏究)」를 쓰고 사학과의 조수를 지냈다.

6·25 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하여, 1951년대한통신(大韓通信) 기자로 일하게 되면서부터 언론계에 투신하였다. 1952년 미국으로 건너가 약 1년간 미네소타대학 신문학과에서 수학하였다.

1954년 한국일보 논설위원에 발탁되었고, 1956년부터 약 3년간 조선일보 논설위원 및 편집국장으로 근무함으로써 언론인으로 본격적인 활약을 하였다. 그 뒤 민국일보 편집국장, 서울일일신문 주필을 거쳐 1963년 동아일보 편집국장·주필로 활동하다가 1968년 『신동아(新東亞)』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그만두기까지 언론계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한국신문편집인협회(韓國新聞編輯人協會) 부회장에 선임되어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신장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 뒤 3선개헌을 계기로 박정희(朴正熙)정권의 독재정치가 가시화됨에 따라 반독재·민주화운동에 주력하였다. 1971년민주수호국민협의회(民主守護國民協議會)의 창립과 동시에 공동대표로 추대되었고, 19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民主回復國民會議)가 결성되자 공동대표로 피선되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유신체제(維新體制) 아래 정부기관의 감시와 탄압으로 사회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에 놓이자, 집에 칩거하며 한국사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언론활동을 하는 동안에도 주목되는 연구성과를 발표하여 왔으나, 약 10년간의 칩거생활 중에는 고조선(古朝鮮)과 삼한(三韓), 그리고 가야사(加耶史)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의 연구에 주력해 많은 논문을 발표하였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으로 정치적 여건이 바뀌자 사회활동을 재개하고, 여러 방면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우선, 국토통일원 고문으로 위촉되었다가 1981년 민족통일중앙협의회 의장의 직임을 맡아 남북통일의 정책방향과 민간운동에 간여했고, 뒤이어 1985년 국정자문위원에 위촉되었다.

또한, 1981년 한국일보 상임고문이 되어 컬럼을 집필하는 등 언론활동을 펼쳤다. 그리고 건국대학교 대우교수, 인하대학교 객원교수로서 한국사를 가르쳤고,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독립기념관 건립위원회 준비위원, 문화재위원회 위원 및 한국사상사학회(韓國思想史學會) 회장으로 학술·문화면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언론활동과 관련해『밀물썰물』·『언관사관(言官史官)』등의 저서가 있다.

한국사관계 저서로『한국사의 재발견』과 과전법 체제와 실학을 중심으로 한 조선시대사 분야의 연구 성과를 엮어서『근세조선사연구(近世朝鮮史硏究)』를 펴냈다. 이 책들은 1980년에 연구업적을 인정받아 각각 한국출판문화상 저작상과 외솔상 문화부문상의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인물로 본 한국고대사』를 비롯해 1985년 이후에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면서『한국근대사산책(韓國近代史散策)』,『고조선사·삼한사연구(古朝鮮史·三韓史硏究)』,『가야사연구(加耶史硏究)』등의 저술을 차례로 엮어 출간하였다.

천관우는 조선후기 실학자(實學者)들의 자료를 두루 살피면서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의 연구경향을 계승 발전시켰던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당시 대만)과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을 하였는데, 특히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의 재검토를 통하여 가야사의 복원을 시도한 연구는 궁극적으로 한국 고대사학계에서 이룩했던 주체적 전통과 민족적 독자성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이자 식민사학(植民史學)의 폐해를 걷어내려는 것이었다.

1970년대 초에 본격적으로 거론되었던 한국 고대국가의 기원 및 형성문제는 광복 이후 고대사연구의 일대 전환점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고대국가의 기원 및 발전과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용어와 개념을 모색하면서, 부족→성읍국가(城邑國家)→영역국가(領域國家)라는 발전단계를 제시하여 고대국가의 형성시기를 소급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성격, 삼한의 성립과정과 제소국(諸小國)의 위치 비정 문제, 임나일본부의 실체, 가야사의 복원 시도 등 그간 소홀하게 취급되었던 연구주제에 주목하고 가야사·신라·백제사 연구를 촉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무엇보다 상고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한국사 전반에 걸친 폭넓은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의 대중화와 역사교육의 중요성도 강조하였다.

상훈과 추모

1985년 중병을 얻어 1991년 1월 67세로 생을 마쳤다. 정부로부터 금관문화훈장을 받았고, 한국출판문화상(저작상)과 외솔상을 받았다.

참고문헌

「천관우[千寬宇(1925∼1991)]의 사학(史學)과 고대사연구(古代史硏究)」(문창로, 『한국고대사연구(韓國古代史硏究)』53, 2009)
『한국사상사학(韓國思想史學)』4·5합집-천관우선생추념논집(千寬宇先生追念論集)-(한국사상사학회(韓國思想史學會) 편, 1994)
『천관우선생환력기념한국사학논총(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논총간행위원회 편, 정음문화사(正音文化社), 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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