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화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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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화
개념
부처의 행적이나 불법의 존엄성을 불교 경전과 의궤에 따라 종이나 천에 그리는 일 또는 그에 종사하는 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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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부처의 행적이나 불법의 존엄성을 불교 경전과 의궤에 따라 종이나 천에 그리는 일 또는 그에 종사하는 장인.
내용

1996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탱화는 종종 사찰에서 쓰이는 모든 그림을 의미하는 불화(佛畫)와 혼용되기도 하지만 엄밀하게는 법당에 예배용으로 거는 좁은 의미의 불화만을 가르킨다.

탱화장은 금어(金漁)·양공(良工)·화사(畫師)·화원(畫員)·화승(畫僧)·탱화질(幀畫秩)·편수(片手)·불모(佛母)·화수(畫手) 등으로 불리웠다. 금어나 화사는 존칭으로, 화원이나 편수는 전자에 비해 스스로를 낮추는 말로 사용되었음이 여러 화기(畫記)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구체적인 차이는 분명하지 않다.

넓은 의미의 불화는 불교의 전래 시기와 일치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탱화는 고려 후기 이전에 그려진 작품이 전하지 않아 이 시기까지의 탱화장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알 길이 없다.

고려 후기에 이르면 귀족 사회를 중심으로 탱화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탱화들도 모두 이 시기의 작품이어서 탱화장의 본격적인 출현 시기는 고려 후기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탱화는 후불탱과 괘불의 형태로 예배의 대상이 되면서 많이 제작되었다. 이에 따라 탱화장이 불교 회화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높아졌다. 따라서 18세기 초·중반기에 활동한 의겸(義謙)과 같은 화승은 일단의 화승 집단을 결성하여 전라도와 경상도 지방을 무대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까지 탱화장은 탱화 이외에도 조상(造像)·개금(改金)·개채(改彩)·개조(改彫)·단청(丹靑) 등 불교 회화의 거의 모든 분야에 참여했다. 정조 연간의 화성(華城) 축성 시에는 단청 작업을 위해 동원되는 사례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조선 말기와 한말에 이르러 대규모 불화 조성이 어렵게 되자 탱화장들은 생계를 목적으로 무격들의 의뢰를 받아 무신도(巫神圖)를 제작해 주는 경우도 있었다.

탱화장들간에 화법의 전수는 주로 사찰 내에서 이루어졌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근역서화징 槿域書畫徵≫이나 ≪화사보략 畫師譜略≫ 등에 돌림자를 사용한 화승들의 이름이 등장하는 것도 대체로 한 스승의 문하에서 화법을 배우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로 여겨진다.

전국적으로 탱화장은 광주(광주광역시 무형문화재, 2012년 지정)와 전라남도에서 지정하였다. 광주의 송복동이 1998년 사망함에 따라 광주에서는 해제되었으나 그의 아들인 송광무가 2012년 탱화장으로 지정되었다. 현재 전라남도는 해남의 고재석(高在奭)이 그 기능보유자로 보호받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불화의 연구』(홍윤식, 원광대학교출판국, 1980)
『문화재도록』(광주광역시, 1997)
『괘불』(윤열수, 대원사, 1991)
『조선후기불화』-전남의 불화전-(전라남도옥과미술관,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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