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석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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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해방 이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을 저술한 작가. 문필가, 민중운동가.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1년 3월 13일
사망 연도
1989년 2월 4일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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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방 이후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인간혁명』, 『역사와 민족』 등을 저술한 작가. 문필가, 민중운동가.
개설

평안북도 용천 출신. 당숙 일형(一亨)이 세운 삼천재(三遷齋)에서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4년덕일학교(德一學校)를 졸업하였다.

1916년양시공립보통학교(楊市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그 해 평양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다. 그러나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가담, 학업을 중단하였다가 1921년정주(定州)의 오산학교(五山學校)에 입학하였다.

그 때 안창호(安昌浩)·이승훈(李昇薰)·조만식(曺晩植)으로부터 민족주의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한 뒤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4년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 1928년 졸업하였다.

생애와 활동사항

재학 중에 일본인 무교회주의자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성서연구에 깊이 영향을 받고 김교신(金敎臣)·송두용(宋斗用)·정상훈(鄭相勳) 등과 함께 무교회주의신앙클럽을 결성하였다.

1927년 동인지 ≪성서조선 聖書朝鮮≫ 창간에 참여하여 글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28년 4월 귀국하여 모교인 오산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가 1938년 3월 사임하였다.

1940년송산(松山)에서 김혁(金赫)이 운영하는 송산학원을 경영하다가 계우회사건(鷄友會事件)에 연루되어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구류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42년≪성서조선≫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1년간을 서대문경찰서에서 미결수로 복역하였다. 1947년 3월 월남하여 YMCA에서 성서강해를 계속하였다.

1956년부터 ≪사상계≫에 자신의 글을 발표하면서 정치적·사회적 문제들을 기탄없이 비판하였고,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면서 자유당정권에 도전하였다.

1961년 5·16군사정변 직후에는 ‘5·16을 어떻게 볼까’로 군사혁명정권에 도전하였다. 1962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방미하였을 때 퀘이커교(Quaker敎)와의 친밀관계를 굳혔다. 1967년 장준하(張俊河)의 국회의원 옥중출마를 지원하기도 하였다.

1970년 4월≪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하였고, 민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반독재민주화운동에 힘을 기울였다.

주요저서로는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1948)·≪인간혁명≫(1961)·≪역사와 민족≫(1964)·≪뜻으로 본 한국역사≫(1967)·≪통일의 길≫(1984)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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