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蓮谷里)에서 파주 광탄(廣灘)으로 넘어가는 고개 길이다.
부근의 지세는 연곡리의 입구가 좌우로 낮은 산이 마치 삼태기 모양으로 둘러 있어 산 위에 매복해 있으면 그 안으로 들어오는 적을 포위하여 섬멸할 수 있기 때문에 전략상으로 매우 주요한 지역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였을 때 한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신각은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중으로 들어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았다. 또 함경도 병마절도사 이혼(李渾)으로부터 지원병을 얻어 북상하는 왜군의 선봉부대를 맞아 해유령 입구에서 전투를 벌여 왜군의 목 70여급(級)을 베는 큰 승리를 얻었다.
그러나 임진강으로 도망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은 한강 패전의 책임을 신각에게 미루고 명령불복종죄로 무고하는 장계를 올렸다. 이에 우의정 유홍(兪泓)은 그 내용을 믿고 신각의 참형을 주창하여 양주에서 참살되었다.
뒤늦게 승전보를 접한 조정에서는 형 집행을 중지하기 위하여 선전관을 파견하였으나 형 집행 후에 현장에 도착하였다. 이곳에는 2,000여 평의 대지 위에 높이 10.6m의 화강암으로 된 사각 기둥의 전첩비를 세웠다. 전첩비 앞에는 충현사(忠顯祠)가 위치하고 있다. 1991년에 세운 것으로 신각, 이양원, 이혼의 3위를 배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