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준호 ()

경제
인물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금융인 · 기업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이칭
이칭
무송(撫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89년(고종 26) 8월 29일
사망 연도
1950년 9월 28일
본관
성산(星山)
출생지
전라남도 영암
내용 요약

현준호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금융인·기업인으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기봉의 아들로 태어났다. 전라남도 창평 영학숙에서 김성수, 송진우와 함께 학습했다. 1920년 호남은행 설립 허가를 받았다. 1924년 학파농장을 건립하고 소유지를 관리했다. 1934년 전남 영암군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사업을 마무리했다. 1937년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제2회 전조선시국강연반에서 활동했다. 1950년 전라남도 광주에서 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

정의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한 관료. 금융인 · 기업인 · 친일반민족행위자.
개설

1889년 8월 29일 전라도 영암에서 출생했다. 호는 무송(撫松)이다. 본관은 성산(星山)으로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를 지낸 현기봉(玄基奉)의 2남 3녀 중 막내다. 일제강점기에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호남은행 은행장, 중추원 참의 등을 지냈다. 1950년 9월 28일 전라남도 광주에서 인민군에게 사살당했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릴 때 한학을 수학하였고 9세에 아버지를 따라 목포로 이주했다. 1906년 6월부터 전라남도 창평에서 김성수(金性洙)의 장인 고정주가 설립한 영학숙(英學塾)에 들어갔다. 여기에서 김성수, 송진우(宋鎭禹), 김병로(金炳魯)와 교유했다. 영학숙을 마치고 1907년 3월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했다. 1912년 1월 휘문의숙을 졸업한 뒤 1912년 4월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예과를 입학해서 1914년 메이지대학 법률학과로 진학했다. 일본에서 송진우가 회장으로 있던 호남다화회(湖南茶話會)에 가입해 김성수, 장덕수(張德秀), 최남선(崔南善), 신익희(申翼熙), 조소앙(趙素昻) 등과 교유했다.

1917년 4월 메이지대학 법률학과를 중퇴하고 귀국했다. 1919년 7월 호남은행발기회 총회에서 발기인 겸 총대를 맡았고, 12월 조선경제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1920년 2월 자본금 150만원의 호남은행 설립 허가를 받았고, 4월 동아일보사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8월 호남은행 창립총회에서 취체역 겸 전무취체역을 맡아 실질적으로 운영했는데, 광주·목포지점에 이어 1922년 순천지점, 1926년 장성출장소를 개설하여 영업지역을 확대했다.

1920년 11월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면협의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보성전문학교 감사, 7월 임시 조선인산업대회 지방위원, 9월 ㈜동아일보 감사에 위촉되었다. 같은 해인 1921년 전라남도 육영회를 설립해서 이사장을 맡았고, 1922년 광주번영회 회장에 취임했다. 1923년 5월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광주지방부 회금(會金)보관위원을 맡았다. 9월 가옥을 신축하며 낙성식에 쓰려던 2,000원을 서선(西鮮)수재구제(500원), 동경진재구제(東京震災救濟)(500원), 광주사립보통학교(300원), 목포사립보통학교(300원), 광주여자야학교(100원), 광주노동야학교(100원), 광주유치원(100원), 광주보육원(100원), 광주소방조(消防組)(300원), 목포소방조(200원) 등에 모두 기부를 했다. 11월 광주면 면협의회원으로 선출되었고, 12월 소작료를 경감하고 지세를 전부 자담(自擔)하였다.

1924년 4월 관선 전라남도 도평의회원에 임명되었다. 7월 현기봉이 사망하자 수확량이 7,000섬에 달하는 토지를 포함해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현기봉의 호를 따서 학파(鶴坡)농장을 건립하고 소유지를 적극적으로 관리하여 농업경영을 개선했다. 대개 선대부터 소작인이 농장을 경작하였는데, 소작료가 주변 농장에 비해 저렴한 편이었으며 적극적인 농사지도와 품종개량 등을 통해 수익률을 증가시켰다.

1926년 5월 전남도시제사(全南道是製絲)㈜ 취체역, 조선생명보험㈜ 감사역을 역임했고, 10월 학산공립보통학교 신축비로 1,400원을 기부해 일본 정부에서 주는 포장(褒狀)을 받았으며, 같은 해 전라남도 농회 고문을 맡았다. 1927년 민선 전라남도 도평의회원 선거에 당선되었고, 5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를 세웠다. 1928년 10월 조선총독부 광주부에서 광주공설운동장 기부금 모집 때 일본인보다 한국인에게 더 과다하게 부담시키는 것을 반대해 도평의회원, 면협의회원, 광주번영회장 등 10여 개의 모든 공직을 사임했다. 11월 쇼와[昭和]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29년 2월 제출했던 사표 일체를 돌려받았으며, 3월 영암운수창고주식회사 취체역과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1930년 1월 호남은행 두취(頭取: 은행장)에 취임했다. 6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해방될 때까지 재임하면서 매년 600원의 수당을 받다가 1939년 6월부터 1,200원, 1944년 12월부터 1,800원으로 올랐다. 1932년 9월 조선유교회 명리원 의정을 지냈고, 10월 중추원을 조선의회로 바꾸어 자치제를 실시하자는 건의서를 중추원에 제출했다. 1932년 6월부터 학파농장 주도로 간척지 사업에 착수해 영암면 춘동리와 호포리 앞바다 100정보를 매립하기 시작했다.

1933년 호남은행이 동래은행을 흡수·합병하였는데, 자본금을 200만원으로 증자해 경상도까지 영업지역을 확대하고 지점을 신설하여 주요 금융기관으로 성장했다. 그해 3월 조선나예방협회(朝鮮癩豫防協會)에 1,000원을 기부해서 일본상훈국에서 포장을 수여했다. 4월 남조선철도주식회사 취체역과 전라남도 수산회 부회장,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경제부 위원으로 활동했다.

1934년 5월 학파농장을 합명회사 형태로 법인화하여 사장에 취임하고, 영암군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사업을 마무리했다. 5월 조선생명보험주식회사 취체역이 되었고, 그해 국방의회 전라남도연합회 부회장에 위촉되었다. 1935년 춘동리와 호포리 간척지와 인접한 영암군 미암면 신포리 간척사업을 착수해서 1936년 5월 완공했다. 1935년 10월 시정 25주년 기념표창과 은배(銀杯)를 받았다. 1936년 2월 광주부교육회 명예회원, 3월 산업경제조사회 위원, 9월 광주번영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37년 4월 광주보호관찰심사회 위원, 『동아일보』 취체역, 경성방직주식회사 취체역을 맡았고, 9월 학무국이 주도하여 중일전쟁의 정당성을 홍보하는 제2회 전조선시국강연반에서 전라남도 담당으로 활동했다. 12월 아들 결혼식을 치르고 남은 500원 가운데 출정군인 유가족에게 200원, 광주제일보통학교 봉안전(奉安殿) 건조비에 200원, 광주제이보통학교에 100원을 기부했다. 같은 달 조선총독부 시정 25주년기념박물관 건립비로 1,000원을 기부해서 일본 정부로부터 포장을 받았다. 그해 전라남도 군사후원연맹 부회장, 국민정신총동원 전라남도연맹 이사장에 임명되었다.

1938년 4월 전남특별지원병후원회 부회장, 5월 응소군인 위원금으로 광주헌병대에 1,000원을 헌납했다. 8월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광주지부 결성식에서 지부장, 시국대책조사회 위원, 10월 호남제탄주식회사 취체역, 11월 전남산업주식회사 취체역을 지냈다. 1938년 6월경 소유자산은 광주·장흥·강진·해남·영암·무안군에 논 673정보, 밭 40정보 등 총 713정보의 학파농장을 비롯하여 순자산 110만원과 개인명의 자산 62만원 등이었다. 1939년 4월 2,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기부했고 5월에도 처가 1,000원에 상당하는 금품을 조선군애국부에 헌납했다. 6월 중앙협화회 평의원, 11월 조선유도(儒道)연합회 상임이사, 경성축산㈜ 취체역, 12월 남만방적㈜ 감사역을 역임했다.

1940년 3월부터 영암군 군서면과 서호면 간척공사에 착수하여 1944년 1기 방조제 공사를 끝냈지만 이후 더 이상 진척하지 못했다. 조선총독부가 군량미 조달을 위해 1940년부터 미곡증산정책을 시행하면서 학파농장의 간척개간 및 토지경영이 국책에 부응한다고 인정받았고, 같은 해 11월 기원 2600년 축전 기념장을 받았다. 1941년 6월 광주대화숙 고문, 8월 흥아보국단 상임위원 겸 전라남도 위원, 10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및 이사로 위촉되었다. 1941년 9월 화신상사㈜ 취체역, 12월 조선방송협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2년 4월 조선총독부가 강제로 호남은행을 동일은행에게 매각하도록 하여 강제 매각당한 후 받은 은행자산 27만원을 일본군용기 헌납(8만원), 전남육영회(2만원), 전남군인후원회(1만원), 충령탑(忠靈塔) 건립기금(3천원), 광주병사부(1만원), 광주 방공 경호시설비(5천원), 광주대화숙(5천원), 광주재향군인회(3천원), 보성전문학교도서관(5천원), 호남은행지점 소재지 공공단체(11만 4천원) 등에 기부했다. 1942년 11월 전남산업㈜ 대표취체역, 1943년 5월 조선농지개발영단 평의원, 11월 임시특별지원병제 실시하는 취지를 선전하는 전라남도 지역파견자로 선정되었다. 1944년 7월 화신산업㈜ 취체역을 맡았다.

해방 직후 조선이화학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유리 제조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였다. 1946년 9월 광주중학기성회에 50만원을 기부했다. 1949년 5월 반민특위에 조사를 받았으나 8월 반민특위 특별검찰부에 의해 기소유예 불기소처분을 받았다.

현준호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5·17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01∼447)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참고문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Ⅳ-1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친일인명사전』3(민족문제연구소, 2009)
『한국기업가사』(조기준, 박영사, 1983)
『실록 재계백화』5·6(배명진, 국제신보사, 1974)
『동아일보』(1923.9.12; 12.31.)
「일제시기 호남재벌 현준호의 학파농장과 자본축적 시스템」(오미일, 『한국민족문화』35, 2009)
「현준호의 자본형성 과정과 친일행위」(박이준, 『한국근현대사연구』40, 2007)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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