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순부(純夫). 할아버지는 동지중추부원사 홍익생(洪益生)이며, 아버지는 홍귀연(洪貴演)이다.
1492년(성종 23) 사마시에 합격한 뒤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정언·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반정에 가담, 좌승지로 이과(李顆)의 옥사(獄事)를 다스리는 데 공을 세워 추성정난공신(推誠定難功臣) 3등에 책록, 당원군(唐原君)에 봉하여졌다.
1508년 호조참판을 거쳐, 대사헌·경기도관찰사·우참찬을 지낸 뒤 1517년 지중추부사·한성부판윤이 되고, 이어 형조판서로서 조광조(趙光祖) 등을 심문한 뒤 국가를 위하는 그들의 절의정신을 오히려 높여야 한다고 왕에게 보고하였다.
이듬해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에 올랐으나 이해 김안로(金安老) 일당이 날조한 작서지변(灼鼠之變)에 연루, 삭직된 뒤 과천으로 추방되었다가 1538년 복관되었다.
전고(典故)에 밝아 정치를 함에 대체를 잃지 않았고, 스스로의 몸가짐에 있어서도 엄정하면서도 관후하였다. 특히 효성이 돈독하였다. 시호는 장희(莊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