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건 동상 ( )

고려시대사
유물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의 청동 조각상.
내용 요약

왕건 동상은 951년에 제작된 고려 태조 왕건의 청동 조각상이다.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개경의 봉은사 진전(眞殿)에 안치되어 연등회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렸다. 고려 망국 이후 1429년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는데, 1992년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으로 왕건의 실제 모습을 형상화하였다. 동명왕 숭배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의 조각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나체상에 옷을 입히는 고구려계통의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 고려의 황제제도를 실증하는 유물로 중요하다.

정의
고려 태조 왕건(王建, 877∼943, 재위 918∼943)의 청동 조각상.
개설

951년(광종 2)경에 제작되었다. 도읍인 개경(開京: 지금의 북한 개성시)봉은사(奉恩寺) 주1의 어좌(御座)에 안치되어, 고려가 망할 때까지 왕실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로 경배되었다.

내용

태조 왕건의 동상은 고려 왕실 최고의 상징물로서 국가의 정기적 제전(祭典)인 연등회(燃燈會)의 첫날이나 국가 중대사가 있을 때에 제사를 올리는 대상이었다. 고려 당시에 제작된 왕건의 초상화들도 여러 점 있었지만, 왕건동상이 가장 신성시되는 대표 상징물이었다.

국가적 최고의 상징물이었던 만큼 그 제사를 둘러싸고 정치적 중요 국면들에서 정파 간에 중요하고 예민한 움직임들이 전개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왕건동상에 대한 제사 변천의 시기구분은 고려 정치사의 시기구분과 연결된다.

고려 왕조가 망하자, 왕건동상은 조선 건국세력에 의해 고려의 태묘(太廟)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중요한 고려왕실 상징물 제거의 일차적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명분상 폐기가 어려워, 1392년 7월 지방으로 옮겨지고, 제례법 개정을 명분으로 1429년(세종 11)에 고려 태조의 능인 현릉(顯陵) 옆에 매장되었다.

1992년 10월 북한에서 현릉 확장 공사 중에 출토되었다. 발견된 후 북한에서 여러 해 동안 부장품 중의 하나로 보고 청동불상이라고 오인되어 전시되기도 하였으나, 제작부터 매장에 이르기까지 고려시대와 조선 초의 기록들을 통해 고려 왕조의 최고의 신성한 상징물이었던 왕건동상임이 밝혀졌다.

특징
  1. 황제의 복식

왕건동상은 황제의 복식을 착용한 나체상 양식이다. 왕건동상은 황제의 관인 주2을 쓰고 있으며, 금제 허리띠 장식의 주3를 띠고 있었다. 옥대는 유물로 함께 나왔으며, 착용한 옷은 부식된 조각이 동상표면에 붙어 있었다. 통천관은 나신의 신체상과 함께 청동으로 주조되었다.

왕건동상의 황제복식은 『고려사』고문서 등에 보이는 고려 초부터 13세기까지의 시기 대부분에 시행된 여러 부문의 제도에서도 나타나는 고려의 황제제도를 조각상과 실물의 복식으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고려의 군주는 대륙의 거란(契丹), 송(宋) 등 강대국 세력에 대해서는 외교적 마찰을 피해 왕을 칭하면서, 자체의 세력권 내에서는 황제를 칭하였다.

  1. 실제모습에 더해진 신성함의 상징

왕건동상은 왕건의 모습을 그린 진영(眞影)과 함께 기본적으로 왕건의 실제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다. 왕건은 후삼국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후 당대에도 큰 권위를 가졌지만, 사후에도 고려왕국의 시조로서 높임을 받고 숭배되었다. 그의 동상은 실제의 모습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최고의 신성함을 나타내는 형상이 가미되었다.

그 하나는 당시 사회적으로 일반화된 불교의 최고의 신성한 존재인 부처나 주4의 신체적 특징이라고 하는 32대인상(大人相)을 왕건상에 일부 적용한 것이다. 그 대부분은 왕건상에 착용한 옷으로 가려진 신체부위에 표현되었다. 왕건상이 언뜻 보기에 불상이나 보살상에서 보는 느낌을 일부 갖는 것은 그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당시 고려가 건국된 한반도 중북부 지방에서 고구려계승의식과도 결합되어 내려오는 뿌리 깊은 동명왕(東明王) 숭배의 신성한 상징물인 동명왕상(東明王像)의 양식, 즉 옷을 입히는 나체상 양식을 적용한 것이다. 동아시아의 불보살상이나 유교의 조각상, 군주의 조각상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착의형 나체상양식인 왕건상은 이러한 고구려계통의 문화에 바탕을 둔 것이다.

의의와 평가

왕건동상은 고려시대의 지배층의 문화 속에서도 유교문화나 불교문화 이외에도, 고대부터 내려오는 토속문화의 전통이 중요한 의미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왕건동상의 양식이 고구려계통의 신상양식인 것은 고려의 고구려계승의식을 문화적 바탕에서도 드러내준다. 또한 고려의 황제제도를 유물로서 실증해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참고문헌

『고려 태조왕건의 동상』(노명호, 지식산업사, 2012)
「고려시대 개경 봉은사의 창건과 태조진전」(한기문,『한국사학보』33, 2008)
「고려태조 왕건 동상의 유전과 문화적 배경」(노명호,『한국사론』50, 2004)
「왕건왕릉에 대하여」(안병찬,『사회과학원학보』1994년 1월호, 평양시, 1994)
「高麗時代の裸形男子倚像」(菊竹淳一,『デアルテ』21, 2005)
주석
주1

창덕궁 안에 조선 역대 왕들의 어진(御眞)을 모신 전각.    우리말샘

주2

황제가 정치나 국가 행정에 관계되는 사무를 보거나 조칙을 내릴 때 쓰던 관.    우리말샘

주3

임금이나 관리의 공복(公服)에 두르던 옥으로 장식한 띠.    우리말샘

주4

인도 신화 속의 임금. 정법(正法)으로 온 세계를 통솔한다고 한다. 여래의 32상(相)을 갖추고 칠보(七寶)를 가지고 있으며 하늘로부터 금, 은, 동, 철의 네 윤보(輪寶)를 얻어 이를 굴리면서 사방을 위엄으로 굴복시킨다.    우리말샘

집필자
노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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