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이 입지하고 있는 지역은 동쪽으로 낙동강 상류의 지류인 이안천이 서에서 동으로 흐르면서 유적의 4.5㎞ 지점에서 영천과 합류하여 흐르다 퇴강리에서 낙동강 본류와 합수된다. 이안천과 영천 주변으로 함창평야가 넓게 형성되어 있으며, 그 주변으로 해발 200∼400m의 산들이 병풍처럼 에워싸고 남쪽에 위치한 해발 238m의 오봉산이 유적 전체를 감싸고 있다. 이곳에 직경 20m 내외 대형 봉토분이 분포하고 있다. 유적이 분포하는 4개의 능선에 따라 ‘가’~‘라’ 지구로 구분하여 발굴조사가 실시되어 삼국시대의 목곽묘 150기, 옹관묘 51기, 석곽묘 177기, 석실묘 45기 등 423기가 확인되었다. 유물은 토기류 930점, 금속유물 936점, 기타 187점 등 약 2,078점이 출토되었다.
목곽묘는 격벽에 연해 ‘ㄷ’자상의 내부 주체를 시설한 Ⅰ형식, 상자형의 내부 주체 한 쪽에 부장한 Ⅱ형식, 양 장벽판 사이에 단벽판을 끼워 ‘ㅍ’자형으로 결구하고 한쪽 단벽 측에 부장한 Ⅲ형식, ‘ㅂ’자형으로 내부 주체를 만들고 위의 공간에 부장한 Ⅳ형식, 묘광에 자갈을 깔아 시상을 마련한 Ⅴ형식, 한 쪽 단벽 측에 부장하고 할석으로 뒷채움한 Ⅵ형식, 목곽과 목관을 구비하고 나머지 공간에 부장한 Ⅶ형식, 평면비 1:2 이하의 넓은 장방형을 한 Ⅷ형식으로 나누어진다. 목곽묘는 대체로 4세기 전반에서 5세기 중후반까지 조영하였다. 목곽묘에서 유물은 고배·장경호·단경호·연질발 등의 토기류, 재갈 등의 마구류, 철모·철겸·철부·성시구 장식·철촉·도자 등의 철기류, 장신구류 13점이 출토되었다. 석곽묘는 등고선과 나란하게 축조되었고 세로쌓기와 가로쌓기를 주로 하였다. 유물은 고배·장경호·단경호·연질발 등의 토기류, 마구류, 철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석실묘는 횡구식석실로 봉분이 남아 있는 것은 4기이며, 일부 석실은 앞선 시기에 축조된 석곽을 파괴하고 설치된 것도 있다.
이 고분군은 석실 구조의 형식변화와 유물의 편년에 따르면, 1~3단계는 목곽묘가 축조되던 시기, 4·5단계는 목곽묘와 석곽묘가 함께 축조되던 시기, 6단계는 석곽묘만 축조되던 시기, 7·8단계는 석곽묘와 석실묘가 함께 축조되던 시기, 9·10단계는 석실묘만 축조되던 시기이다. 조영 시기는 1단계를 4세기 전반, 10단계를 7세기 전반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고배가 빈약하게 부장된 점이 특이하며, 특히 백제계로 보이는 연질발이 다수 부장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이 원래 신라의 영향하에 있었지만 일시적으로 백제와 친연관계가 있었음을 상정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