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교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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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제국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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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초등 · 중등 교육에 이어지는 가장 높은 단계의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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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초등 · 중등 교육에 이어지는 가장 높은 단계의 교육.
내용

제3단계 교육 또는 중등 후 교육(中等後敎育)이라고도 한다. 국제연합교육과학문화기구(UNESCO)의 정의에 의하면 고등교육의 공통된 성격은 ① 중등교육을 수료하고 대개의 경우 어떤 형태의 선발시험을 거쳐 진학하는 18세 이상의 남녀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 ② 종합대학·단과대학·전문교육을 실시하는 연구기관 등에서 행하는 교육, ③ 학문연구와 밀접한 관련 아래 전문적 직업교육·기술교육·예술교육·교원 양성 등을 행하는 교육, ④ 그 수료자에게는 특정한 학위 또는 졸업 증서를 주어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하는 점 등이라 하였다.

우리 나라의 경우 고등교육기관으로는 대학(교)·교육대학·사범대학·전문대학·방송통신대학·산업대학 및 대학 정도의 각종학교·삼군사관학교·과학기술원 등과 각종 대학원이 있다. 이들 대부분은 교육부 산하에 설치, 운영되고 있다.

(1) 조선시대 이전의 고등교육

우리 나라 고등교육의 기원은 삼국시대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에 설립된 태학(太學)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학교인 동시에 고등교육기관이었다.

건국 후 나라가 발전함에 따라 정치 및 전쟁에 종사할 지도자를 양성해야 할 필요가 있어 주로 귀족·특수 계급의 자제들을 교육하기 시작하였다.

백제와 신라에는 교육기관 설립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으나, 이미 중앙집권적 정치체제와 엄격한 계급제도가 형성된 시기였으므로, 계급 지위와 지배자 또는 귀족의 소양을 갖추기 위한 고등교육이 베풀어졌으리라고 추측된다.

한편 정규 교육기관은 아니지만 신라 고유의 청년집단인 화랑도(花郞徒)는, 인재 양성과 민중교화를 교육의 사명으로 볼 때 고구려의 태학에 못지않는 교육 전통을 수립하였다.

통일신라 신문왕 2년(682)에 설립된 국학(國學)과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은 그 시대 최고 단계의 교육을 실시한 고등교육기관으로, 유학 이념에 뿌리를 둔 인재 양성 및 관리 양성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특히 국자감은 국자학·태학·사문학·율학·서학·산학의 경사 육학(京師六學)으로 나누어 교육, 일종의 종합대학 면모를 갖추었다. 그 밖에 사학(私學)인 12도(十二徒)는 관학이 쇠퇴해 가는 시기에 설립되어, 국자감을 대신하여 고려시대의 고등교육을 진흥시키는 데 커다란 몫을 담당하였다.

조선시대 역시 고려의 국자감을 이어받아 최고 학부인 성균관(成均館)에서 고등교육을 실시하였다. 성균관 운영은 지사·대사성·사성·사예 등 38인의 직원을 두었고, 학생 정원은 300인으로 진사와 생원의 자격을 가진 유생을 수용하였는데, 남는 자리가 있으면 사학의 학생 중에서 선발하여 보충하였다.

교육 내용은 사서오경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들에 대한 강학(講學)과 제술(製述)을 중요한 학과목으로 삼았다. 교육의 목적이 국가의 인재를 양성하여 관리를 만들고 유교가 요구하는 선비 양성에 있었으므로 훈육에는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였다.

그 중에서도 일상생활의 예절을 존중하였고 단체생활을 통하여 대인관계의 법도를 높이게 하였으며, 사생활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자아의 인격을 높이게 하였다. 그리고 학생들의 자치정신을 기르는 반면, 노·장·불(老·莊·佛)과 백가잡류(百家雜流)의 서적을 엄금함으로써 유교의 본도를 걷는 이상적인 선비를 양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이전까지의 고등교육은, 전통시대의 모든 나라가 그렇듯이 신분과 계급에 엄격한 제한을 가하여 일부 특수층에만 기회가 주어졌다.

계급주의적 사회조직과 한자 문화권의 테두리 안에서 교육과 학문의 중심이 된 전근대적·전통적 고등교육은 유교의 인생관과 세계관의 원천이 되었으며, 고급 관료 공급원으로서 중요한 구실을 해왔다.

(2) 근대의 고등교육

근대적 의미의 고등교육은 19세기 말 문호의 개방과 함께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시기의 고등교육기관은 중등교육기관과 구분하기 어려우며, 다만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고등교육기관의 전신으로서 그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먼저 개화기의 고등교육은 근대 학교의 세 가지 원류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는 선교계통의 기독교계 사학으로서, 1886년 배재학당(培材學堂)·이화학당(梨花學堂)이 설립되어 현존하는 고등교육기관으로는 가장 역사가 길다.

두 학교보다는 늦으나 같은 해 고아원 겸 기숙학교의 언더우드학당이 설립되어 경신학교(儆新學校)의 전신이 되었으며, 후에 이들 학교의 대학부를 기초로 하여 전문학교와 대학이 생겨났다. 1897년에는 숭실학교(崇實學校), 1905년에는 세브란스 의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개화기에 설립된 796개의 기독교계 사학은 대부분 중등교육기관이었으며,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것은 위 학교들과 선교사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몇몇 신학교가 있었다.

둘째는 민간인이 설립한 사립학교로서, 1910년까지 1,427개 학교에 달하였으나, 이미 정치와 행정에 깊숙이 관련하기 시작한 일제 당국은 민족교육의 온상인 민간인 사립학교를 강하게 통제하였다.

이에 따라 당시에 설립된 사학들은 제대로 발전하지 못하고 문을 닫거나 대부분 중등교육기관으로 유지하는 데 그쳤다. 다만 1905년에 설립된 보성학교(普成學校)만 후일 전문학교로 개편되었다.

마지막으로, 개화기 고등교육의 또 하나의 원류를 형성하는 것은 정부가 설립한 관학이다. 정부는 1880년대 초부터 근대식 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하여 1894년의 갑오경장 이후 학교 설립의 각종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에 따라 설립된 한성사범학교·법관양성소·경성의학교·농상공학교 등이 후일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국권 상실 후 일제는 새 학제에 따라 고등교육기관을 전문학교 체제로 개편함과 동시에 관학과 사학을 막론하고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개화기에 크게 일어났던 고등교육 발전의 기운은 좌절되었고, 일제 식민지교육 방침은 이른바 ‘시세(時勢)와 민도(民度)에 맞는 교육’이란 허울 아래 한국인의 고등교육 기회를 극히 제한하였다.

이 시기는 3단계로 분류할 수 있는데, 먼저 1910∼1919년까지의 제1기에는 6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관립 전문학교로 경성법학전문학교·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공업전문학교·수원농림전문학교가 있었으며, 기독교계 사학으로 연희전문학교·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있었다.

이들 전문학교의 교육 내용은 수신·일어 및 전문에 관한 사항과 체조 등을 과하도록 하였다. 사학에 대해서는 1915년 <사립학교규칙>을 공포하여 민간인 사학에 대해 통제와 억압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이에 따라 이전의 보성전문학교 등은 각종학교로 격하되었다.

이들 6개 전문학교는 1919년 5월 말 현재, 재학생수가 585명에 불과하였으며, 교원수는 92명이었으나 이 중 한국인은 21명뿐이었다.

제2기인 1920∼1936년에는 표면상으로 문화정치를 표방하여, 종전의 3, 4년제의 전문학교와 더불어 최초로 대학교육의 길을 마련하였다.

이에 따라 설립된 유일한 대학인 관립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은 뜻있는 민족지도자들의 민립대학(民立大學) 설치운동에 대한 무마책으로 출발하였으나, 한국인에게도 정상적인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적인 장치가 최초로 마련되었다는 점에서 하나의 진전이라 볼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은 2년제 예과와 3, 4년의 본과를 두고 본과에는 의학부와 법문학부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운영은 식민지적인 이중구조를 면하지 못하여, 실제 생활에 필요한 의학부와 법문학부만 설치하고 이공계는 일부러 인가하지 않았다. 또한 한국 학생의 정원을 일본인의 3분의 1 내지 2분의 1로 극히 제한하였으며, 교원은 거의 전원을 일본인으로 충당하였다.

한편 전문학교로는 관·공립으로 경성고등상업학교(1922)·평양의학전문학교(1929)·대구의학전문학교(1933)가 설립되어, 관·공립 전문학교는 모두 7개로 증가했다.

사립학교도 1915년 각종학교로 격하되었다가 새로 전문학교로 인가받은 보성전문학교·숭실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와, 이때 새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1929)·경성약학전문학교(1930)·중앙불교전문학교(1930) 등이 설립되었다.

이 시기에는 일제의 계속적인 탄압과 억압정책에도 불구하고 현저하게 고등교육이 발전하여, 1936년 총 15개의 전문학교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제3기인 일제말 1937∼1945년 광복되기 전까지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교육의 수난시대였으며, 특히 사학의 경우 그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처지였다. 당시의 고등교육 실태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째로 1938년 전시의 필요에 따라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신설된 점이다. 둘째로 1943년까지 전문학교의 수가 15개에서 20개로 증가하였다.

관립인 경성광산전문학교(1939)·부산고등수산학교(1941), 사립인 명륜전문학교(1937)·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38)·대동공업전문학교(1938)·숙명여자전문학교(1939)의 6개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1939년 평양의 숭실전문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대항, 자진 폐교하여 20개가 되었다.

셋째로 일제 말기에는 1943년 <전시교육비상조치령>에 따라 모든 고등교육기관이 교육 자체의 목적 수행보다는 전시 동원체제의 일환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사립 고등교육기관은 유례없는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이 때 혜화전문학교를 폐지하고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를 세웠으며, 이화여자전문학교 대신 농림지도원양성소로, 연희전문학교는 경성공업전문학교로 개편하게 하였다. 또한 명륜전문학교를 폐지하고 대신 명륜연성소를 발족시켰으며, 관립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고등상업학교를 폐지하고 경성경제전문학교를 발족시켰다.

끝으로 1944년 경성사범학교와 대구사범학교를 승격시켜 사범전문학교를 만드는 한편, 경성제국대학에 중등교원양성소를 부설하고 교원연수기관을 마련, 교원 훈련과 연수에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의 고등교육기관은 징병·학도지원병 등으로 학생을 빼앗기고 갖가지의 전시 근로동원에 응하면서, 교육 내용이나 체제가 마치 전시 요원훈련소와 같은 성격과 임무를 강요당하였다.

(3) 광복 후의 고등교육

광복 후 미군정하의 고등교육정책은 개방적·자유방임적 성격을 띠어, 많은 사람들이 사재를 투입하여 대학을 설립하였다. 이는 고등교육의 양적 팽창과 질적 저하의 문제를 낳게 한 근원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새로운 시대적 환경 속에서 고등교육 발전의 새 국면을 전개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공식 통계에 따르면 광복 당시 남한에는 19개 학교의 고등교육기관이 있었고 한국인 재적자수는 7,819명에 불과하였다. 광복 이후 새로운 정치·경제·사회·문화 풍토 속에서 고등교육은 기복이 있었으나, 대체로 계속적인 양적 팽창을 이어왔고, 다양한 제도의 발전과 교육 여건 개선과 내실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1949년 12월 <교육법>이 공포되었으며, 대학은 단과대학과 종합대학교로 분류되었다. 대학에는 3개 이상의 단과대학과 대학원을 두기로 하였으며, 수업연한은 4∼6년으로 하였다.

이렇듯 <교육법>과 동법 시행령을 갖춘 뒤 출범하게 된 대학교육은 기회가 크게 확충됨으로써 종전과 같이 극히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던 고등교육의 기회가 균등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1945∼1948년, 1950∼1953년, 1980∼1983년 등은 고등교육의 확충이 특히 두드러졌으며 이른바 대학붐을 형성하였다. 6·25전쟁 중에는 전국의 피난지에서 전시 연합대학(戰時聯合大學)이 발족되고, 그들이 폐지됨을 계기로 지방 국립대학이 많이 창설, 발족된 사실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1945∼1997년 고등교육은 양적 팽창을 계속하여, 1945∼1997년의 52년간 학생수를 기준으로 하면 357배로 경이적인 팽창 성장을 가져 왔다.

1997년 현재 고등교육기관의 총 재적자수는 280만에 가까운 실정이며, 8·15광복 당시 8천 명 미만이었던 것과 비교해 본다면 우리 국민의 높은 교육열과 정부의 개방적 교육정책이 서로 어울려 세계에 유래를 찾기 힘든 성장을 기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문고등학교(일반계 고등학교)의 졸업자는 95%가 대학 진학을 희망하고 그 중 81.4%가 실제로 진학한 셈이다. 진학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실업계 고등학교에서조차 진학희망자 비율이 47.4%에 이르며 실제로 29.1%의 진학율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지역간·계층간·남녀간에 아직도 격차가 남아 있으며 완전한 기회 균등과 균형 발전이 이루어진 것이 아님은 물론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아 있는 셈이다.

고등교육의 중요한 한 부분을 이루고 있는 단기 고등교육기관은 1949년의 <교육법>에 의하여 제도화되고 1951년의 동법 개정으로 고등학교에서 연결되는 2년제 대학으로 정착된 초급대학이 1963년에 발족하였다.

또한 중학교에서 연결되었던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 1970년에 발족된 2, 3년제의 전문학교 등 여러 갈래로 분화되어 있었다. 그 뒤 1977년 전문대학으로 통일되었으며, 1978년에 개편작업이 끝나 1979년 초부터 새로운 2, 3년제 전문대학으로 발족되었다.

전문대학은 1983년 128개로 수가 늘어났으나 대학으로 승격, 합병 등으로 수가 줄어들기도 하고 정책의 추이나 취업의 변화 추세 등 다양한 요인의 작용으로 기복과 변천을 면치 못하였다. 1998년 현재 전문대학의 수는 155개 학교를 헤아리며 그 대종을 이루는 것은 사립이다(144교).

또 한가지 특기할만한 사실은 1998년 고등교육법의 시행과 더불어 전문대학의 학교 이름도 4년제 일반 대학과 구분이 안되게 바꿀 수 있게 되었다. 일부 전문대학은 여전히 4년제 대학으로 승격 발전할 것을 추구하고 있다.

이 밖에도 고등교육기관으로서 교육대학과 사범대학 등 교원 양성기관이 있다. 초등교원 양성기관인 교육대학은 1961년 기존의 사범학교를 개편하여 1962년부터 발족하였다. 1970년대까지 16개를 헤아렸으나 공급 과잉으로 11개 학교로 줄였고, 1981∼1984년에 4년제로 승격, 개편되었으며, 모두 국립이라는 특징이 있다.

중등교원 양성기관인 사범대학은 9개의 국립 사범대학을 포함하여 35개 학교에 달하며, 이들 사범대학은 교육 전문가 양성 기능도 함께 수행하고 있다. 사범대학은 공주사범대학과 청주사범대학을 제외하고 모두 종합대학교 내의 사범대학으로 운영되고 있다.

한편 1985년에 발족된 한국교원대학교(韓國敎員大學校)는 유치원·특수학교·국민학교 및 중고등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종합대학교의 성격을 띤 학교로서 새로운 구상에 의한 실험적 성격이 짙다.

신학교 등을 비롯하여 1997년 현재 10개 학교에 달하는 각종학교와 한국방송통신대학도 고등교육의 범주에 속한다. 또한 국방부 산하의 삼군사관학교, 과학기술처 산하의 한국과학기술원 등도 같은 의미에서 고등교육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특히 한국방송통신대학은 1972년 서울대학교 부설의 한국방송초급대학으로 발족하여, 1981년부터 4년제로 승격되었고 1997년 현재 18개 학과에 37만879명이 재학하고 있다.

지역학습관 12개를 가지고 전국에 걸쳐서 방송과 통신교육에 의한 학습을 실시함으로써 고등교육 기회 확대에 새로운 차원의 기여를 하고 있는 셈이다.

대전광역시 대덕에 있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은 광주 소재의 과학기술원과 더불어 과학기술처 산하에 운영되는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유명하다. 다른 부처 산하에도 비슷한 중등부 교육기관들이 있으며 이들의 존재는 한국 고등교육의 다양성을 나타내주고 있다. 예컨대 국방부 산하의 고등교육기관으로서 육해공군 사관학교 등의 존재는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한국의 고등교육을 말할 때 1998년 새로운 교육법규체제에서 고등교육법에 의거 공식명칭이 산업대학으로 개칭된 독특한 존재를 빼놓을 수 없다. 그것은 본래 1982년에 개방대학이란 이름으로 발족하였으며, 1971년 영국에서 출범한 공개대학(Open University)을 본딴 것이었다.

1997년 현재 국립 8개 학교, 사립 11개 학교를 합쳐서 19개의 산업대학이 설치되어 있으며 대부분 4년제 일반 대학과 구분하기 어려운 이름을 사용하며 대학원도 부설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다양한 프로그램과 교육방법을 동원하고 야간제·계절제 등을 활용하면서 근로청소년이나 산업체에서 일하는 성인 근로자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확대, 제공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학문 중심의 일반대학과는 그 본질을 달리하는 것이다.

대학원 교육의 강화는 1970년대 이후 강조되어 왔고 최근 그 수가 눈에 띌 만큼 늘어났다. 1997년 현재 한국의 대학원은 4년제 대학교, 산업대학교 등에 부설되어 있으나 최근에는 교육대학 등에서도 대학원 설치가 추진되고 있다.

1997년 현재 일반 대학원과 특수대학원을 합하여 모두 592개의 대학원이 설치 운영되고 있으며, 석사 및 박사과정을 합하여 15만 1000명이 재적하고 있다.

그러나 대학원 운영은 학부와 연계하여 시행되고 있으며 일부에서 대학원 중심대학을 지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연구기능의 강화를 지향하고 있을 뿐 대학원 전속교수를 따로 갖고 있는 곳은 별로 찾아보기 어렵다. 아무튼 대학원 교육의 강화 추세는 한국 고등교육의 특기할만한 사실이다.

대학원 교육의 내실면에서 살펴본다면 교수의 확보, 교수와 학술연구의 연계성, 도서나 실험실습시설 등 여러 측면에서 미비한 점이 많은 실정이다.

최근 대학원 중심 대학의 운영이 강조되고 있으며, 서울대학교는 그와 같은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대학원들이 아직도 학부 중심 대학운영의 부수적 기능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1957년부터 일부 대학에 설치되어 지금은 경영·행정·교육 등 여러 분야에 걸쳐 설치, 운영되고 있는 전문대학원은 그 대부분이 내실이 없는 실태이다.

우리 나라의 고등교육은 1980년을 분계선으로 하여 이른바 대중화 단계에 들어섰다. 트로우(Trow,M.)의 개념 모형에 의하면, 해당 연령층의 취학률이 15% 미만이면 엘리트단계이고, 15∼50%이면 대중화단계, 50%를 넘어서면 보편화단계라 할 수 있다.

우리 나라에서는 1980년에 15%를 넘어선 이후 최근 급격히 늘어나 30%선에 육박하고 있어, 대중화 추세가 급속히 추진된 셈이다. 이는 세계 주요 선진국가에서 최근 고등교육의 양적 성장이 정체 내지 후퇴 현상을 겪고 있는 사실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고등교육의 대중화 추세의 급진전은 고등교육에 대한 사회적 수요와 인력 수요의 증대를 반영한다.

고등학교 이하의 각급학교 교육이 의무화, 보편화된 결과의 상향적 파급효과가 크며, 고등교육 향학열이 계속 높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뿐만 아니라 산업의 고도화에 따라서 고급 인력에 대한 수요가 증대되고 세계적으로 웅비하려는 국민의 기상과 기개가 드높다는 사실을 여실히 나타낸다.

또한 그와 같은 현실을 고등교육 정책면에서 적절히 반영하여 대학정원정책을 조절하고 고등교육 인구의 증가를 허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고등교육의 확충과 기회 균등의 확대는 일단 바람직한 사실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반면에 양적 증가만을 가지고 고등교육의 발전을 단정할 수 없으며, 이른바 수월성(秀越性)의 추구를 비롯하여 많은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과제로 남아 있다.

현재 우리 나라 고등교육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하나, 몇 가지 정책의 논쟁점을 열거한다면 다음과 같다. 첫째, 자율과 통제의 조화 문제이다. 1950년대까지만 하여도 자율이 지나쳐 방임에 가까웠으나 1960년대 이후 통제가 강화되었다.

학생들의 현실 참여, 사학의 정상에서 이탈한 경영 방식, 인력 수요를 무시한 양적 팽창, 기타 여러 가지 요인에 대한 비판론이 대두되었으며, 1961년의 5·16군사정변 이후 대학 정비 단행을 계기로 강력한 통제정책이 추진되었다.

통제의 강화는 대학의 성장을 돕는 정책을 병행해야 하므로 대학의 균형 발전에 도움이 된 일면이 있었다. 그러나 대학의 자율과 창의성을 억제하고 대학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있으므로 완화가 시급한 과제로 등장하였다. 그간 자율화가 부분적으로 추진되었으나 그 성과는 미흡하였으며, 자율과 통제의 조화 문제는 미결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특히 고등교육 인구의 4분의 3을 수용하고 있는 사학의 경우, 자율성의 문제는 더욱 심각한 과제임에 틀림없다. 둘째 기회의 확충과 균등이 급속히 촉진된 반면, 고등교육의 수월성에 대한 배려가 미흡하였음은 앞으로 중대한 도전이며 해결 과제이다.

고등교육의 수월성은 궁극적으로는 그 산출면에서 질의 문제를 의미하여, 당장에는 교육 연구 등의 기능 수행을 위한 여건을 정비하고 내실을 기하는 문제로 돌아간다. 우수한 교수의 확보, 현대적인 시설과 설비, 특히 도서관 설비나 실험실습 시설·설비의 확보와 활용, 각종 복지시설의 정비, 가난한 영재들을 위한 장학금제도의 확충·강화 등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와 같은 교육 여건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교육 재정의 확보가 시급한 과제이며, 고등교육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학의 경우에 학생부담에만 의존하려는 데는 한계가 있음이 명백하다.

따라서 사학에 대한 재정 지원을 늘이는 일이 불가피한 과제로 제기되고 있다. 급격한 사회 변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과 가치관의 변천 등에 대비하여 고등교육의 교육 내용을 시대와 사회의 요청에 맞추어 더욱 적합하게 개편하며 교육의 방법면에서도 새로운 혁신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고등교육에서 자칫 소홀해지기 쉬운 인간교육과 덕성교육이 주요시되며, 그것은 넓은 의미의 교양교육 개편을 위한 새 과제를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대학에서 국민윤리를 이수하게 하는 것은 한 방법으로 생각되나 실효성이 문제시되고 있다.

셋째로 고도의 과학기술시대, 특히 전자시대에 대비하여 전자기술을 교육과 교육행정 처리에 적용하는 것은 절실한 시대의 요청이 아닐 수 없다.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그 방면의 연구가 함께 이루어져야 하며, 학술연구면에서도 새로운 도전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대학원 교육의 강화와 학술 진흥은 우리 나라 고등교육이 마주하고 있는 중대한 과제이다.

끝으로 새로운 정치경제 및 사회문화적 환경에 적응하고 급변하는 사회 요구에 맞춘 대학 개혁이 전국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대학 개혁은 1995년 5월 31일 이후 추진되어 온 교육개혁의 하나로서, 그리고 그 핵심과제의 하나로서 추진되고 있으며 막대한 재정이 필요하고 더불어 대학의 구조조정, 교육과정 개편, 대학에 대한 자체평가와 외부평가 등이 한데 어울리면서 개별 대학은 물론, 대학 내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또한 대학간 경쟁이 격화되고 있으며 대학 구성원들, 교직원과 학생, 사학의 경우에는 재단 등에게 커다란 책임을 부과하고 있다. 특히 이른바 IMF시대의 난관이 가로놓여 있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대학 개혁의 추진은 어려운 과제로 남아 있는 실정이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增補文獻備考』
『朝鮮敎育史』(李萬珪, 乙酉文化社, 1948)
『韓國近代敎育史』(孫仁銖, 延世大學校 出版部, 1971)
『韓國高等敎育의 實態』(문교부 교육정책심의회, 1973)
『韓國高等敎育硏究』(金鍾喆, 培英社, 1979)
『韓國敎育 30年』(文敎部, 1980)
『한국교육연감』(대한교육연합회, 새한문화사, 1985·1986)
『교육통계연보』(교육부, 1997)
집필자
김종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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