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목판본. 이언적이 평안북도 강계(江界)에서 귀양살이할 때 전인이 따라와 학문에 관한 질문을 하였고 언적은 답하였는데, 후에 전인이 그 내용을 기록하였다. 그리고 전인의 3세손인 홍기(弘炁)에 이르러 처음으로 간행되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원래 『관서문답록』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고, 『남명유집(南冥遺集)』 가운데 「해관서문답(解關西問答)」 한 편이 실려 있을 뿐이었다. 『관서문답록』 초간본에 발문을 쓴 이단상(李端相)에 의하면, 그는 『남명유집』 속의 「해관서문답」에 관해서 두 가지 의문점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이언적과 이황(李滉) 그리고 조식(曺植)의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였으며, 또 하나는 이언적의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와 이황이 이중구(李仲久)와 논의한 『대학장구유서』의 청송(聽訟) 일절(一節)이 서로 다르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이단상이 성동(城東)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을 때, 이언적의 현손(玄孫) 홍기의 방문을 받고 비로소 『관서문답록』을 보게 되었고, 그 의문을 풀 수 있었다고 한다. 이단상은 『관서문답록』이 마치 공자와 그의 아들 백어(伯魚)를 연상케 하는 부자간의 문답록이라고 극찬하고 있다.
『관서문답록』은 대체로 학문에 관한 내용이지만, 이언적이 조식에 관해 인물평을 한 부분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초간본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판본(板本)이 훼손당하게 되어, 50여년 후에 중간본이 후손 학년(鶴年)에 의해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중간본이 낡아지자, 중간본이 나온 지 92년 만에 학년의 후손인 욱(昱)에 의하여 다시 중간되었다.
이 책은 이언적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임은 물론이고, 지금도 문제가 되는 이언적·이황과 조식의 관계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