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암사 ()

불교
유적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숭제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도집산(都集山)에 창건한 사찰.
이칭
이칭
영구사(靈龜寺)
유적
건립 시기
삼국시대
관련 국가
신라
관련 인물
숭제(崇濟), 각운(覺雲), 언(尙彦), 긍선(亘璇), 김정희
소재지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길 131-144
내용 요약

구암사(龜巖寺)는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도집산(都集山)에 있는 사찰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숭제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1392년(태조 1)에 각운(覺雲)이 절을 고쳐 짓고, 구암사라 이름을 바꾸었다.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인 선운사(禪雲寺)의 말사이다. 임진왜란으로 절이 소실되어 전란 이후에 다시 지었다.

목차
정의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숭제가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도집산(都集山)에 창건한 사찰.
건립경위

구암사(龜巖寺)는 전북특별자치도 순창군 복흥면 도집산(都集山) 중턱에 위치한 사찰이다. 도집산의 원래 이름은 영구산(靈龜山)이었다. 사찰의 동편에는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아래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산의 이름을 영구산이라 하고 절의 이름도 구암사라 했다고 한다. 623년(무왕 24) 숭제(崇濟)가 구암사를 창건했다고 하는데, 그가 신라 경덕왕대에 활약한 진표(眞表)의 스승 숭제와 같은 인물인지는 확정할 수 없다. 또한 구암사를 삼국시대 숭제가 창건했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인지 확인할 수 없다. 이후 조선시대까지 구암사에 대한 기록은 없고, 관련된 유물도 발견되지 않았다.

변천

1392년(태조 1)에 각운(覺雲)이 허물어진 구암사를 다시 지었으며, 태종 때 절을 다시 손질했다. 당시의 절터는 현재의 구암폭포 부근에 있다. 구암사는 이때부터 절이 점차 번창하기 시작하여 전국 규모의 수도 도량을 이루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임진왜란 이후 절을 다시 짓게 되고, 화엄종주(華嚴宗主)로 널리 알려진 상언(尙彦, 1707~1791)이 이 절에서 주3하게 되었다. 1800년대 초에 백파 긍선(白坡亘璇, 1767~1852)이 현재의 절터에 건물들을 새로이 짓고, 주4 법회를 개최하면서 절의 세가 점차 커졌다. 구암사에 머물던 긍선은 이곳에서 『정혜 결사문(定慧結社文)』, 『선문수경(禪門手鏡)』 등을 저술하였다. 구암사에는 당시 긍선과 교우가 깊었던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현판, 긍선과 김정희가 주고받은 많은 서간(書簡)들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현판과 서간은 한국전쟁 때 절과 함께 모두 불탔다. 현재는 수 편의 추사필 주5과 추사가 바위에 새긴 글씨 정도만 남아 있다.

이후 정관(正觀, ?~1813), 설두 유형(雪竇有炯, 1824~1889), 설유 처명(雪乳處明, 1858~1904), 학명(鶴鳴, 1867~1929), 석전(石顚, 1870~1948), 운기(雲起, 1898~1982) 등 많은 고승이 구암사에서 배출되었다. 19세기에는 유형이 이 절에 머물렀고, 유형의 제자 처명은 조선 후기의 유명한 성리학자 전우(田愚, 1841∼1922)와 함께 이곳에서 불교 교리를 연구했다. 근대의 고승 한영(漢永, 1870∼1948) 또한 구암사에서 처명의 법을 이어받았다.

1940년 일헌(一軒)이 낡은 절을 손질하고, 1957년에 고쳐 지었으나, 1959년에 다시 소실되었다. 1973년 대웅전과 주6를 고쳤고, 1997년 삼성각을 새로 지었다.

형태와 특징

절 내에 현존하는 건물로는 팔작집[ ^2] 형태인 정면 5칸, 측면 3칸짜리 대웅전과 최근에 지은 삼성각 및 요사채 2동이 있다. 대웅전 내부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하는 삼존불이 있다. 또한 절의 입구에 상언, 긍선, 정관 세 대사의 승탑과 거북바위가 있다.

구암사의 은행나무는 2004년 9월 10일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의 기념물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이 은행나무는 무학대사가 구암사에 방문한 것을 기념하고 왕조의 번창을 염원하는 뜻에서 심었다고 전해진다.

2000년에 구암사에서 『월인석보(月印釋譜)』 제15권이 발견되어 보물 제745-10호로 지정되었다. 구암사에서 발견된 『월인석보』는 훈민정음 창제 직후에 사용되었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 이는 불교와 관련된 최초의 주7라는 점에서 가치 높은 문헌이다.

참고문헌

원전

『중수구암사기(重修龜巖寺記)』

단행본

권상로,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이고운·박설산, 『명산고찰(名山古刹) 따라』(우진관광문화사, 1982)
『문화유적총람(文化遺蹟總覽)』(문화재관리국, 1977)
『전통사찰총서』 9 (사찰문화연구원, 1997)

논문

강순애, 「初槧本 『月印釋譜』 권15에 관한 연구」(서지학연구 25, 2003)

인터넷 자료

국가문화유산포털
디지털순창문화대전
주석
주2

네 귀에 모두 추녀를 달아 지은 집. 우리말샘

주3

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함을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4

봉불(奉佛)이나 점안식을 거행할 때와 부단염불이나 만일(萬日) 공양을 할 때에, 불상의 손에 걸어 매는 오색실로 된 줄. 한끝을 불당 밖으로 내보내 여러 사람에게 붙잡게 하여 불연(佛緣)을 맺게 한다. 우리말샘

주5

종이, 비단, 널빤지 따위에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써서 방 안이나 문 위에 걸어 놓는 액자. 우리말샘

주6

절에 있는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 우리말샘

주7

한문을 한글로 풀어서 쓴 책.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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