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이씨(完山李氏). 호는 설두(雪竇). 전라도 옥과현(玉果縣 : 지금의 전라남도 곡성) 출신. 아버지는 동복(東馥)이며, 어머니는 박씨이다. 유년에 서숙에서 유학의 전적들을 섭렵하였고, 19세 때 백암산 지장암(地藏庵)에서 쾌일(快逸)을 은사로 득도하고 도암(道巖)을 계사(戒師)로 삼았다.
처음에는 교학을 배워 조계산 한성 강백(翰醒講伯)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고, 구족계를 받은 뒤 여러 대덕을 찾아 교학을 문답하고, 뒤에 긍선(亘璇)으로부터 『화엄경』을 배웠으며, 도원(道圓)의 법맥을 이었다. 28세에 긍선의 강석(講席)을 이어받아 화엄강주가 되어 학인을 20여 년 동안 지도하였다.
1870년(고종 7) 각진국사(覺眞國師)의 옛 도량으로서 퇴락하여 빈터로 남아있던 영광군 모악산 불갑사(佛岬寺)로 옮겨 절을 중창하였고, 1889년 양주 천마산에서 『선문염송(禪門拈頌)』 강회를 베풀고 강독하였으며, 그 때 『선원소류(禪源溯流)』와 『염송회편(拈頌會編)』을 저술하였다.
그 해 가을 구암사로 돌아와 입적하였다. 나이 65세, 법랍 48세였다. 서관(瑞寬)·태선(太先)과 함께 화엄의 3대 강백으로 일컬어졌으며, 긍선의 『선문수경(禪門手鏡)』을 비판한 의순(意恂)의 『선문사변만어(禪門四辨漫語)』를 반박하여 긍선을 옹호한 것으로 유명하다.
법맥은 긍선―인유(仁裕)―국찬(國燦)―쾌일―도원―유형으로 이어지며, 제자는 처명(處明)·호정(鎬政)·만익(萬益) 등이 있다. 저서로는 『선원소류』 1권과 『설두시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