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룡 ()

불교
인물
운문사 주지를 역임한 승려.
이칭
월광(月光)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여성
출생 연도
1892년(고종 29)
사망 연도
1965년
본관
동래(東萊)
출생지
전라북도 전주
정의
운문사 주지를 역임한 승려.
개설

전라북도 전주 출생. 근대 비구니계의 3인 가운데 한 인물이다. 속성은 정(鄭)씨이며, 본관은 동래(東萊). 당호는 월광(月光). 아버지 정원명, 어머니 장성우의 맏딸이다. 형제 5남매 중 4남매가 출가하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만공스님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생애와 활동사항

1909년 운문사의 선덕을 은사로 출가하였으며, 1911년 해인사의 사바를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았는데, 금룡이라는 법명은 이때 받은 것이다. 이후 통도사 해암의 문하에서 대교과를 수료하였으며, 1922년에는 구하(九河)에게 입실하면서 월광이라는 당호를 받았다. 이것은 근대 불교계에서 비구니가 비구에게 입실한 최초의 경우에 해당한다.

이(理)와 사(事)를 겸비한 승려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운문사 주지를 비롯하여 서울 개운사(開運寺), 부산 소림사(少林寺) 등의 사찰에 주석하며 수행과 대중포교에 힘썼다. 특히 개운사에 머무르는 동안 조계종단의 불교정화운동에 적극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아울러 운문사 주지로 재직하고 있을 때에는 당시 통도사 강주이던 혜륜을 초빙하여 강당을 개설하여 비구니 교육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당시 불교계는 비구니가 법상에 오르는 것조차 인정하지 않는 풍토였는데, 금룡은 1년에 평균 3달씩이나 『법화경』, 『화엄경』 산림(山林: 큰 법회)을 개최하여 대강백의 입지를 굳건하게 세워 나갔다.

61세까지 매일 3시간 이상을 눕지 않았다고 하며, 오후 불식(不食)도 철저히 준수하여 많은 후학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1958년에는 제자 광우(光雨)에게 가사와 대단주 등의 법장(法藏: 깨달음을 상징하는 물건. 즉, 법맥을 전하는 표시)을 전하였는데, 이 일은 비구니가 비구니에게 법을 전한 최초 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비구니들의 현대교육 필요성을 역설하였고, 비구니도 법맥을 전승할 수 있음을 직접 보여주고 실천하였다. 전주정혜사에서 세속 나이 74세, 법랍 55세로 입적하였다. 다비식 후 수습된 사리 3과는 지금 정혜사 부도에 봉안되어 있다.

참고문헌

『강원총람』(조계종교육원, 1997)
『법보신문』(1991.3.18)
집필자
김상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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