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6년(명종 1) 진사가 되고, 1549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승문원의 천거로 사국(史局)에 들어갔다.
봉교(奉敎)·예조좌랑·정언(正言)·헌납(獻納)·충청도어사·부수찬(副修撰)·전적(典籍)을 거쳐 지평이 되고, 1559년 정언으로 있을 때 당시의 이조판서 윤개(尹漑)가 불공평한 인사행정을 하자, 이를 비난한 김규(金虯)가 모욕죄로 몰려 죽게 된 것을 구하였다가 이듬해 이로 인해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61년 첨정을 거쳐 강릉부사로 나갔다가, 1565년 검상(檢詳)·사인(舍人)·장령(掌令)·집의(執義)·교리(校理)·응교(應敎)·사복시정(司僕寺正) 등을 지냈다. 1567년 동부승지·좌승지·강원도관찰사·대사성·호조참의에 올랐다.
1572년(선조 5) 천추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이어 대사간·병조참의·전주부윤·부제학·대사헌·호조참판·형조참판을 거쳐 예조판서에 이르렀다. 역학에
자득(自得)주 01)의 묘를 얻었고, 경학에 전력하여 모든 의론이 다 거기에서 유출되었으며, 기품이 청아하고 효우(孝友)가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숙간(肅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