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서는 초기부터 농업생산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농기구의 보급이 필요하다는 인식 아래 이에 관한 몇 가지 정책이 있었다. 이의 구체적인 사례로는, 나라에서 농민들로부터 철을 거두는 일을 중지하거나 양을 줄이도록 한 것(태종실록 권13 태종 7년 6월 계미조)과 나라에서 농기구를 생산하여 값싸게 보급하자는 논의(세종실록 권105 세종 26년 7월 신유조)를 들 수 있다.
또 김종서(金宗瑞)는 농기를 들여오는 무역자에게는 면세하도록 하자는 건의(태종실록 권29 태종 15년 3월 병오조)까지 하였다. 당시의 농기구 무역이란, 중국 농기구의 수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발달한 외국 농기구의 수입을 더욱 장려하자는 뜻인 것이다.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으나 이런 사실들을 통해 당시의 위정자들이 농기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 北學議』에서 “지금 사람들은 옛 관습에 젖어 관청에서 파는 농기구를 사려 들지 않는다.”고 한탄한 것을 보면, 앞의 시책 가운데 나라에서 농기구를 생산, 판매하는 일은 18세기 말기에도 계속되었으나 정작 농민들은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관제품의 질이 매우 낮았던 데에 큰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농가에서는 무엇보다 소가 모자라서 쟁기나 써레 따위를 사람이 끄는 일이 많았다. 강희맹(姜希孟)은 그의 『금양잡록 衿陽雜錄』에서 “마을에 100호의 농가가 있으나…… 황소는 한두 마리뿐이어서 소 대신 아홉 사람을 고용해서 땅을 간다.”고 하였으며, 『현종실록』 현종 11년 8월조에도 돌림병으로 전국의 소가 많이 죽어 사람이 쟁기를 대신 끌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사정은 18세기 말기까지도 바뀌지 않았다.
1789년(정조 22)에 내려진 이른바 「권농정구농서윤음 勸農政求農書綸音」에 따라 지방의 지식인들은 소가 없어 땅을 갈지 못하는 집이 적지않으니 통(統) 단위로 협동기구를 만들거나 농계(農契)를 모아 소를 장만하게 하자는 건의를 했다.
또한 농기구도 부족해서 부자들이 하루 빌려주고 며칠 동안 품으로 대신 갚도록 하는데, 그나마 얻어쓰기도 어려운 실정이므로 나라에서 대폭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따라서 조선시대에는 중기 이후에도 일반 농가의 농기구 보급률이 매우 낮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농사직설 農事直說』은 우리 나라 최초의 농서로서 농학상 큰 의의를 지닌 명저이며, 당시 농기구의 모습을 살피는 데에도 뺄 수 없는 귀중한 서책이다. 무엇보다 농기구 이름을 이두나 향찰로 적어서 우리는 비로소 이 책을 통해서 조선왕조 전기의 농구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농사직설』에 나타난 농기구는 모두 10종으로, 이에는 따비·쟁기·쇠스랑·써레·끌개[撈]·번지·고무래·곰방메·끌개[縳柴木兩參個]·끌개[木斫背]·끌개[輪木]·오줌구유·호미·낫·도리깨·키·날개·거적·섬·되·말·석·부리망 등 23가지가 포함된다.
이 가운데 땅을 삶는 연장의 종류와 수량은 압도적으로 많아서 39%에 이른다. 더구나 쇠스랑과 써레가 네 번, 번지와 곰방메가 두 번씩 등장하고 끌개도 4종이나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당시에는 흙덩이를 고루 부수는 일에 큰 관심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당시의 농업기술과 관련이 깊은 것이다.
수리시설이 거의 없는 데다가 가뭄이 잦았으므로 무엇보다 흙을 잘게 삶고 바닥을 판판하게 골라서 씨를 뿌린 다음 이를 잘 덮어서 수분의 증발을 막아야 할 필요성이 절실하였으리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때에는 논벼보다 밭벼를 더 많이 재배했던 것도 한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 책에서는 농기구 이름을 중국명 그대로 쓰거나 중국명을 앞세우고 우리 이름을 붙이거나 이름을 대지 않고 형태묘사로 대신하는 등의 방법으로 적었다. 『북학의』는 농업전문서가 아님에도 저자가 농기구를 본격적으로 다루었다.
그는 우리 것과 중국 농기구를 비교해 이의 장단점을 살폈으며, 재래농기구의 개량과 선진농기구 보급을 위한 구체적인 방안까지도 제시하였다(중국 농기를 수입, 제작하여 서울 근교에서 실제로 써보이면 농민들은 이를 따를 것이라 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저자 자신이 무자위[水車]의 모형을 만들어 농민들 앞에서 실험하였다.
박지원(朴趾源)의 『과농소초 課農小抄』는 농기구에 관한 항목을 따로 두고 이를 구체적으로 다룬 최초의 서책이다. 그는 농기조(農器條)에서 26종의 중국 농기구와 우리 것에 관한 의견을 덧붙였으며, 수리조(水利條)에서는 28개 연장의 개량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중국의 풍구를 스스로 제작, 실험하여 보인 일도 있었지만 농민들은 곡물의 양이 줄어드는 것을 꺼려서 이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춘궁기에 나라에서 내어준 곡식에는 잡물(雜物)이 많이 섞여 있었던지라 깨끗이 고른 곡식으로 갚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서호수(徐浩修)의 『해동농서 海東農書』에는 29종의 농기구 그림을 실었으며, 그들의 이름도 한글로 적었다. 종래 우리 농기구 이름을 ‘향명(鄕名)’ 또는 ‘속명(俗名)’이라고 낮추고 그나마 향찰이나 이두로 적었던 데에 비하면 그의 이러한 시도는 획기적인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정병하(鄭秉夏)는 『농정촬요 農政撮要』에서 26종의 농기구를 설명하면서 일본의 농업기술 도입에 관한 주장을 폈다.
한편, 사육신이었던 하위지(河緯之)가 그의 양자에게 남긴 유권(遺卷)을 통해 조선시대 초기에 한 개인이 소유하였던 농기구의 양을 알 수 있다.
이 문헌에 나타난 연장은 모두 20점으로, 그는 대표적인 상류 지배층의 한 사람으로서 선산에서 농장까지 경영하였던 만큼 개인 소유로서는 최대량인 셈이다. 하위지의 농기구와 1960년대말 각 지방 독농가들의 연장을 비교해 보면, 500년이라는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중요 농기구의 보유량에는 큰 차이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초기부터 농기구 보급에 대한 몇 가지 시책을 베풀었으나 성과가 적었고, 중기 이후에 실학자들이 농기구 개량에 앞장섰지만 중국 연장을 지나치게 내세웠던 까닭에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리고 농민들이 타성에 젖어 있었던 점도 농기구 발달을 막은 큰 원인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