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경초(景初), 호는 행촌(杏村)·습정(習靜). 아버지는 장사랑(將仕郎) 민학수(閔鶴壽)이다. 어려서는 신광한(申光漢)의 문하에서, 장성한 뒤는 서경덕(徐敬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서경덕으로부터 주정(主靜)의 설(說)을 듣고 크게 감화되어 자기가 처하던 재(齋)의 이름을 ‘습정(習靜)’이라 하였다 한다. 1568년(선조 1) 효행으로 천거되어 효릉참봉(孝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곧 학행이 알려져 전생서주부(典牲署主簿)로 승진되었다.
이어 공조·형조의 좌랑을 거쳐 토산현감(兎山縣監)으로 나갔다가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고양으로 돌아가 학문에 전심하였다. 1575년 사헌부지평으로 다시 조정에 들었으나, 마침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상을 당하여 예관(禮官)들이 오사모(烏紗帽)·흑각대(黑角帶)로 상복을 정하자, 민순은 송나라 효종(孝宗)의 백모 3년(白帽三年)의 고제(古制)로 고쳐 준용할 것을 건의하여 실시하게 하였다.
그러나 물의를 빚어, 그해 6월 다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초야에 묻혔다. 그 뒤 용강현령(龍岡縣令)·청풍군수(淸風郡守)를 지내고 사헌부장령을 거쳐 수안군수(遂安郡守)에 이르렀으나, 모두 임명된 지 얼마 안 되어 사직하고는 하였다. 그 뒤로는 연안(延安)·성천(成川)의 부사(府使)·공조정랑 등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퇴하고 향리에서 후진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홍치상(洪致祥) 등이 문하에서 배출되었다. 개성의 화곡서원(花谷書院), 고양의 문봉서원(文峯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행촌집(杏村集)』이 있다.